leeheetaek.gif동업의 이점을 살려 사업을 성공시키고 ‘한국인은 서로 싸우기 때문에 동업을 못한다’는 치욕적 통설을 실적으로 반박한 구자선 이희택씨가 마침내 갈라선다.

지난 1977년 7월1일 동업으로 회사를 설립한 지 35년 만이다. “오랜 세월 같이 잘 지냈다. 사업도 성공했다. 이젠 나이 때문에 각자 딴 길을 가기로 했다.” 5월말로 회사를 완전 인수, 단독운영에 나설 구사장의 말이다.

koojasun.gif이사장보다 7살 연하의 구씨는 올해 75세로 회사를 떠나는 이사장에게 그가 93세가 될 때까지 앞으로 18년간 생계비 등을 지원한다는 조건이다. 68세 구씨는 장차 은퇴없이 계속 일할 생각이다. “내게 은퇴는 없다.” 이씨는 골프를 몹시 좋아하는 것과 달리 자신은 일과 봉사가 취미라고. “동업체의 분해는 두 사람 간에 밀고 당기는 오랜 협상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동업시작 때의 초기 정신을 늘 가슴에 간직해왔다. 그래서 그분이 그런 조건을 말씀하시기에 머리 속으로 따지고 계산하는 절차 생략하고 그 자리에서 찬성했다.”

지금껏 금전 배당문제로 다툰 적이 없다는 ‘역사와 전통’에 예외는 없다는 것이다. 두부·만두·콩나물·떡볶이·국수 등 동양식품을 생산·도매하는 평화식품은 노스욕 핀치/웨스턴 부근 1.7에이커·건평 3만6천 평방피트 건물에 있다. 지난 2008년 말 234만 달러에 매입했다. 가격 등으로 볼 때 또 하나의 ‘히트’였다.

지난달 21일 상공회의소(회장 정창헌) 주최 월레 조찬모임이 평화식품에서 열렸다. 이날 강사 구씨의 성공담은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냈다. 참석한 20여 회원 업체대표들은 그의 말을 한자도 안 놓치겠다는 듯 열심히 메모했다. 이어서 가진 공장시찰에서도 회원들은 많은 것을 배우거나 참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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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25명이 흰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벙거지 모자를 썼다. 직원이건 방문자건 화장실 출입 등으로 단 1분이라도 작업장을 떠났다가 다시 들어올 때는 신발을 소독약에 문질러 병균을 없애야 한다. 이같은 청결원칙 때문에 상공회의소 방문자들도 모자를 썼다. 가운만 안 입었을 뿐이다. 공장바닥에는 티끌 하나 없고 벽이나 구석, 천장에도 먼지나 거미줄 같은 불결한 것들이 없었다.

공장에서는 만두를 자동으로 만드는 기계 등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밀가루반죽부터 속을 넣고 말아서 닫은 후 익혔다가 다시 냉동시켜 포장될 때까지 전 공정을 기계가 맡았다. 사람 손이 불필요했다. 고용증진에는 역행이지만 그만큼 정결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런 철저한 작업환경과 자동기계들 덕분에 주정부 허가는 쉽게 땄다. 앞으로 회사를 단독운영할 구사장은 시장을 더욱 확장하고 그러기 위해서 연방허가를 따는 것이 당면 목표다.

이곳서 생산하는 모든 식품은 철저하게 유기농(organic)이라고 구씨는 강조했다. 화학비료나 조미료는 일절 쓰지 않는다는 것. 기독교 신앙심이 깊기로도 유명한 장로(중앙장로교회)의 말이다. 이런 사실과 함께 성실, 정직한 노력이 소문나자 ‘평화’상표는 한국시장은 물론, 중국시장과 서양시장에서 주요 품목이 됐다. 이제는 로블러 등 외국인들도 알아주는 공급자의 위치를 굳혔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동업자 두 분의 뼈를 깍는 노력이 밑바탕에 있었다. 지난 1973년 이민한 구씨는 지렁이도 잡아 보았고 한국식품점서 뒷일도 해봤다. 모두가 신통치 않았다. 당시 한국인들이 많이 일하던 자동차머플러 공장 ‘A&P 파트’에 입사, 일단 식생활걱정을 면했다. 이 공장에서 구씨외 이씬 두 사람은 운명의 동업자가 된 것이다.

원래 그들은 서독광산에 서 광원으로 고생했던 ‘서독동우회’인연이 있었다. ‘동우회’라는 단어는 비리와 부정, 가난에 찌든 한국을 떠나 난생처음 서독 광산산 깊은 땅속에서 함께 동거동락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미로 통했다. 서로 얼굴은 몰라도 동우회회원이라 하면 목숨을 나눈 ‘전우’라는 의미가 있었다. 자연히 의리와 동지애가 싹텄다.

두 사람은 하루의 고된 공장일이 끝나면 이씨가 집에서 토속적 방법으로 기른 콩나물을 식품점에 배달했고 그것도 모자라 주말이면 이삿짐 나르는 일도 했다. 동우회 정신으로 3가지 잡을 뛰던 시절이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무슨 일을 하건 수입을 반반씩 나누었다. 이 전통은 35년 내내 변함이 없었다.

pyunghwa.gif두부는 76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수’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제조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가진 것은 투지와 의욕뿐. 이들은 마지막 방법으로 중국두부공장 쓰레기통을 뒤졌다. 이렇게 해서 간수란 두부 만드는데 절대 필요한 두부응고제임을 알아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호랑이 담배피는 시절이었다.

조찬강연중 구사장은 어느듯 자기 과거를 살짝 드러냈다. 어린 시절 서울서 그는 학교보다는 입에 풀칠이 더 급했다. 당시는 그런 시대였으므로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신문팔이, 껌팔이에 용감히 뛰어들었다. 학교에 다닐 어린 나이에 버스에서 껌을 팔았다. 신문을 배달하고 거리에서 신문도 팔아 보았다. 어린이는 어느 날 장사하는 틈 사이에 인기만화 ‘엄마찾아 3만리’(김종래 작)를 보게 됐다. 여기서 그는 큰 감명을 받았다. 아버지 술값과 노름값에 팔린 어머니를 찾아나서는 13세 소년 주인공을 보고 그는 자기도 절망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노력하면 엄마를 찾는 것 같은 성공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그의 사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벤자민 프랭크린(미국)의 자서전이었다. 독학으로 대학자. 발명가, 외교관, 사상가 된 프랭크린의 얘기는 그를 크게 자극했다. 그를 정신적 지주로 간직하면서 그는 독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정교사로 무려 8년간 일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만한 지식을 얻었던 것이다. 그의 근면성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몸에 뱄다. 고난과 역경에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그는 73년에 밟은 캐나다라는 새 땅에서 직장이 없어도 겁이 나지 않았다. 하루는 큰 자루에 삼양라면을 잔뜩 넣고 이누잇(에스키모)를 찾아 북극으로 향하기도 했었다. 이런 저런 실패와 경험 끝에 콩나물사장 이씨를 만났으니 그의 동업 제안에 사실 주저할 형편은 아니었다. 골프도, 술, 담배도 안하고 오직 일을 위해 태어났다는 그의 일과는 새벽 2시45분에 시작된다. 20분 후에는 그는 회사 책상에 앉아있다. 새벽기도도 나가고 명상도하다보면 7시가 되고 직원들이 나타난다. 사장은 늘 직원들보다 먼저 출근한다. 대신 밤에는 9시 취침이다.

의견 충돌도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요. 의견이 달라서 해결이 안나면 누구도 고집부리지 않고 일단 접어놓습니다. 그리고 생각나면 다시 꺼내서 차근차근 또 논의하지요.” 부인들도 의견이 맞아야 동업이 되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그래서 우린 부인들이 업체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하는 원칙을 세웠지요. 지금은 달라졌지만.” 이게 동업성공의 비법이라면 모든 동업실패의 배후에는 여자가 있다? 사실여부를 증명할 수도 없거니와 여성들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다.

이것 뿐인가. 아니 또하나가 있다. 즉 말로 됐던 글로 됐건 일단 합의된 사항에 대해선 절대로 뒷말을 안하는 것. 1만 달러를 투자해서 만든 회사가 오늘날 온타리오 굴지의 식품회사가 된 이면에는 이런 원칙들이 있었다.


김명규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