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10052801.gif스웨덴으로 이주한 독일계 3세인 잉바르는 어렸을 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사람들에게 성냥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100개씩 포장된 성냥을 값싸게 구입, 낱개로 팔아 3배 이익을 냈다. 성냥 외에 생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품, 봄철에는 씨앗 등을 팔았고 후에는 볼펜과 연필 등 학용품까지 취급했다.

 잉바르가 17세 되던 해 그의 부친은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돈을 벌고 학업도 무사히 마쳤다며 포상금을 주었다. 그는 이 돈을 투자해 1943년 아이케아IKEA 소매상을 차렸다. IKEA는 그의 이름(Ingvar Kamprad)과 그가 태어난 농장(Elmtaiyd) 및 도시이름 (Aqunnaryd)의 첫 자들을 따서 만든 것이다. IKEA는 주로 지갑, 사진, 보석, 나일론 양말 등 생활용품 등을 박리다매로 팔았다. 

 1945년(19세) 지방신문에 광고를 내고 우유배달차를 이용해 생활용품들을 가정집에 배달하고 기차역 등을 찾아다니며 판매했다. 1947년(21세) 지방가구제조회사에서 생산된 가구를 취급하게 되었고, 1951년(25세) IKEA를 가구만 전문 취급하는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잉바르는 1953년(27세) IKEA 전시장을 만들고 박리다매정책을 도입, 경쟁사들을 물리쳤다. 이에 경쟁사들은 가구제조회사에 압력을 가하며 보이콧에 들어갔다. 궁지에 몰린 잉바르는 경쟁사와 달리 패션보다는 성능위주의 가구를 직접 디자인하게 되었고 생산과 완제품을 보관하는 창고사업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었다. 

 1958년(32세) 앨무룰트시에 첫 매점을 열었다. 값을 낮추기 위해 고객들이 손쉽게 조립할 수 있는  가구를 고안했다.  납작한 상자에 포장된 조립식 가구는 창고 자리를 적게 차지할 뿐 아니라 수송비까지 저렴, 특히 중산층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차지했다. 

 1960년(34세)에는 고객들이 매장에서 오래 쇼핑을 즐기게 하기 위해 식당도 열었다. 처음에는 재래식 매장을 통한 소매를 하다가 1963년(37세) 노르웨이에도 매장을 열었다. 그의 사업은 계속 번창, 현재 35개국의 대도시에 300개 이상의 대형창고식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경쟁사와 가격을 맞추기 위해 가구 대부분은 중국에서 만든다. 

 잉바르는 우수한 디자이너를 고용,  조립에 필요한 설명도에 그림으로 표현하는 세계 공통조립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값싼 가구로 중산층 이하 고객에게서만 인기를 끌었던 IKEA제품은 중산층이 줄어들고 빈부차가 심해지는 선진국의 경제구조 변화로  매출이 크게 늘었다. 

 IKEA는 가구의 월마트WALMART로 불리기도 하지만 고가의 주방가구 등 새로운 패션으로 젊은 층도 고객으로 만들었다. 특히 이사를 자주하는 젊은층은 이사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존의 IKEA가구를 버리고 새 IKEA제품을 구입하기도 한다. 그는 매장의 입구와 출구를 명확히 하고 출구에 식당을 차려놓아 고객들이 쇼핑 후 식당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전략을 썼다.  

 그는 세계 10대 부호 대열에 들어가지만 그의 대부분 재산은 재단(Stichy INGKA Foundation)에 옮겨져 있다. 잉카재단은 IKEA지주회사로 빌게이츠재단보다 90억 달러 많은 360억 달러로 추산되지만 이 재단은 절세와 합병M&A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잉바르는 검소한 생활을 즐겨 종업원들과 같이 IKEA 간이식당에서 돈을 내고 식사하고 비행기는 3등석을, 출근은 버스나 15년 된 볼보로 한다. 또한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다음해 선물을 위해 크리스마스쇼핑을 한다. 그의 검소한 이미지는 IKEA의 효율적인 운영과 가구디자인에 반영되고 있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