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은 번창했다.
그러나 한 사업에 만족할 수 없는 게 그의 단점. 그렇다고 이것 찔끔, 저것 찔끔 손댄다는 뜻은 아니다. 피가 끓었다. 한가지 일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 꼭 몇 가지를 동시상영 해야 직성이 풀렸다.
처음 사회에 뛰어들면서부터 1인3역, 4역은 보통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던 1975년, 부모님 따라 캐나다로 건너온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이 바로 캘거리였다. 영어 한마디 벙긋할 수도, 들을 수도 없어 대학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갔다. 몇 살 어린 동생같은 아이들 틈에서 12~13학년 2년을 공부했다.
고교 졸업 후 마운틴로열칼리지, 캘거리대학 등으로 옮겨 다니며 디자인, 건축 등을 공부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비즈니스.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론보다 실전을 택했다. 비즈니스 공부 1년, 대학생활 3년 만에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장삿길에 나섰다. 결혼도 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독립이 필요한 시기였다.
가장 흔한 편의점에 뛰어들었다. 캘거리는 당시에도 오일붐이 일던 때라 흥청거렸다. 편의점 가게는 혈기방장(血氣方壯)한 25세 청년에겐 애초부터 궁합이 맞지 않았다. 부업으로 무역을 시작했다. 무역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고 다른 한인들도 그랬듯 보따리장사였다. 장난감, 문방구, 생활용품 등등 닥치는 대로 사다 팔았다.
1년간 편의점과 보따리 무역으로 돈을 꽤 벌었다. 소형소매점이 지금은 그런대로 먹고 살만 하지만 사양화 운명이라는 걸 본능으로 감지했다. 젊은 시절 새로운 블루오션(Blue Ocean)이 어디일까 고심하던 차에 식당이 눈에 확 들어왔던 것.

날개를 달다
몬티스를 거점으로 김 사장은 훨훨 날아다녔다.
캘거리 다운타운 한복판에 초대형 팝레스토랑을 냈다.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두 곳 모두 객장 넓이가 1만5천 평방피트에 달했다. 김 사장은 그때 생각하면 "젊은 나이에 참 겁도 없었다."
손님들에게 음악을 제공했다. 녹음된 음악은 맛이 나지 않았다. 연주자들을 불러 라이브 공연을 하게 했다. 하나하나 늘리다 보니 아예 완전한 밴드를 구성하게 됐다. 80년대 이 팝레스토랑과 밴드들의 음악공연은 캘거리의 명물이었다.
지역사회 유지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였다. 또 캐나다 인기인들이 캘거리를 거쳐갈 땐 꼭 이곳에서 공연을 했다. 덕분에 '준 킴'도 캘거리 명사로 떠올랐다.
밴드를 운영하다보니 아예 전문 엔터테인먼트회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었다.
가게를 운영할 때 보니 도매업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매상을 창업했다.
80년대만 해도 비디오가 유망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비디오점을 개업했다.
멋있는 와인바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꾸몄다.
여유 자금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땅도 사고 빌딩도 사서 운영했다.
이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취미 삼아서 사업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남들이 보면 그냥 쉽게 하는 것 같았지만 빠져 나와야 할 때를 김 사장은 정확하게 짚었고 결심이 서면 칼같이 실행했다.
20대 후반~30대 중반 김 사장은 거칠 게 없었다. 자잘한 실패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엔터테인먼트 사업. 꼭 잘 될 것 같았는데 캘거리 좁은 바닥에서 이 사업은 시장성이 없었다. 캐나다 전국으로 뛰어야 하는데 그 정도는 역부족. 몇 년 만에 접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얻은 평생교훈을 생각하면 사실 손해랄 것도 없다.
24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일했지만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공평했다. 김 사장에게 모든 걸 허락하지는 않았다. 잠 한번 푹 자보는 게 소원이었던 김 사장은 91년 어느날 갑자기 레스토랑 몬티스에서 쓰러졌다. 이유는 뻔했다. 과로.
부인 박미숙씨가 놀라 달려왔다. "좀 쉬면 되겠지~"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부인은 이미 결심을 굳힌 뒤였다. 모든 걸 정리하자고 했다. 단호했다.
"지금 돈이 무슨 필요 있어요? 그만하세요." 그 뒤로 부인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틈만 나면 '그만하라'고 한다. 그 뒤로 하나하나 정리했다. 92년 꿈의 무대였던 몬티스를 마지막으로 팔아넘겼다.
긴 휴식이 찾아왔다.
(조영권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