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 1세가 할 수 있는 일로서는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함께,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만족스럽습니다.”
리치먼드힐에서 박스안경점(Park's Optical)을 운영하고 있는 박정현(49)·현금이(Julia·45)씨는 한인사회에서 보기 드문 ‘부부 안경사(optician)’다.
“남편이 한국에서는 증권사에서 일했어요. 수명이 짧은 직업의 특성상 ‘만일에 대비해’ 제가 늦깎이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1999년 전문대 안경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남편이 기술이민을 신청해둔 상태였는데 학교졸업과 동시에 이민을 하게 됐죠. 그리곤 안경과의 인연은 끝인 줄 알았어요.”
안경과의 질긴 인연
아내 현씨는 아이들만을 데리고 먼저 입국, 기러기부부 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 5월의 일이었다. 본의 아닌 별거상태가 됐던 부부는 아내의 채근에 못 이겨 결국 남편이 직장을 정리하고 들어옴으로써 8개월 만에 재결합하게 됐다. 부부에게는 대학 1학년인 딸(민희·Agnes)과 고교 12학년인 아들(제영)이 있다.
“제가 워낙 낯을 많이 가렸거든요. 공부를 하긴 했지만 안경일로 밥을 먹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기존 안경업소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어요. 역시나 대부분 힘들 거라며 고개를 젓더군요. 지레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죠.” 아내 현씨의 말이다.
당시 주변의 조언을 종합해보면 “역시 남들이 먼저 갔던 길이 편하다는 것”이었다고.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1년 반쯤 세탁소·편의점 등을 찾아 킹스턴에서부터 토버모리까지 온타리오 곳곳을 돌아다녔다. 신발수선업소를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민동기 한 사람이 현씨가 안경공부를 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공부해 자격증을 딸 것을 권했다. 학교에 등록해 같이 공부하자는 거였다. 하지만 현씨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걱정이었다. 그래도 부딪쳐보기로 했다.
“오크빌에 살던 때였는데 배리의 조지언 칼리지까지 달려갔죠. 지금은 토론토의 세네카 칼리지에도 2년짜리 풀타임 안경사 과정이 개설돼있지만 당시만 해도 4년짜리 파트타임이어서 조지언 칼리지가 2년짜리로는 유일했거든요. 짧은 영어 탓에 전화문의로는 한계가 있어 학교로 직접 찾아가 코디네이터를 붙잡고 매달리다시피했죠. 도와달라고, 꼭 공부하고 싶다고....”
쉽지 않았던 만학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부부는 함께 칼리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막상 공부해보니 한국과 캐나다의 수업은 완전히 달랐다. 한국은 거의 이론 위주였던 반면 이곳에서는 실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서 공부한 게 도움이 될 것이라던 막연한 기대는 깨져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딱 일주일 강의를 듣고 난 뒤 생각했죠. 하루빨리 그만둬야겠구나.... 공부 때문에 이사까지 온 것은 억울했지만 강의가 하나도 안 들리는데 어쩌겠어요. 딱 청각장애인이 된 느낌이었죠. 같은 반 학생들과 하루 종일 나누는 말이라곤 ‘하이’가 전부였으니까요.”
하지만 남편은 “이왕 등록금 낸 게 있으니 6개월만 버텨보자”며 아내를 달랬다. 무엇보다 문제는 코압(현장실습)이었다. 코압크레딧을 따지 못하면 졸업시험을 볼 수 없었고 그러면 자격증시험도 응시할 수 없었기 때문. 하지만 나이 많은 동양계, 그것도 영어가 짧은 이들을 써주겠다는 안경업소는 드물었다. 부부는 60명의 동급생 중 최고령자에 속했다. 영어는 나란히 꼴찌를 다퉜다. 한인은 모두 5명. 그나마 1명은 영어를 쓰는 2세였다. 그래도 남편은 방학 4개월 전부터 안경업소들을 돌며 무수하게 이력서를 뿌린 끝에 코압기회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아내 현씨는 1학기만 마치고 그만둘 생각이었단다. 그런데 2학기 때 OSAP에서 ‘밀레니엄 보조금’ 명목으로 3천 달러를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 다음 학기에도 등록한다는 조건이었다. 결국 3천 달러에 눈이 멀어(?) 그만두려던 학교에 다시 등록한 현씨는 결국 졸업까지 한 뒤 우여곡절 끝에 오타와에서 코압을 구할 수 있었다. 온 가족이 다시 오타와로 이사를 해야 했다. “혼자 공부해야 했다면 진작 그만뒀을 거예요.”
남편 박씨는 “칼리지의 특성상 공부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부부는 영어를 뺀 과목에서는 늘 과에서 1, 2등을 다퉜다고. 하지만 졸업할 때까지도 지긋지긋한 영어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었다. 숙제를 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프리젠테이션이라도 잡혀있으면 쉬는 날에도 영어강박증에 시달려야 했다. 주말이면 도서관이 집이었다. 덕분에 아이들도 도서관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힘들었던 당시를 떠올리던 남편은 “집사람은 승부욕이 강해 함께 시험공부를 하며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주곤 했었다”며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다.
“삶 스스로 개척 행복”학교를 졸업하고 부부가 함께 안경사 자격증을 손에 쥔 때가 2006년 2월. 이민 온 지 5년 만이었다. 그제야 ‘자력’으로 생활이 가능해졌다. 코압시절에는 시간당 9.50달러, 자격증을 땄어도 인턴생활 때는 14.50달러가 고작이었다. 공부하는 사이 이민 올 때 가져왔던 ‘전 재산’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정식 안경사가 되자 시급이 21달러로 껑충 올랐다. 함께 일하니 먹고살만해졌다.
현씨는 이민결정 자체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도 후회와 만족이 교차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여자들의 ‘일반적 위상’을 생각할 때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손으로 개척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무척 행복하다고 말한다. 일하는 시간이 짧고 평생직장인 데다 일요일에 꼬박꼬박 쉴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단다.
지금 하고 있는 업소를 연 지가 3년이 다 돼간다. 보통 안경업소는 자리잡는 데 3~5년이 걸린다고 한다. “아직까진 홍보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단골과 신규손님이 꾸준히 늘고 있어 매상은 나쁘진 않은 수준”이란다. 현재 한인-비한인 고객의 비중은 65-35 정도다. 비한인 손님은 서비스 때문에 다시 찾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한인들은 가격을 상대적으로 중요시한다고.
고민 100% 공유“장점요? 무엇보다 할 수 있는 일이 같다는 거죠. 서로가 서로를 보완·대체할 수 있으니까요.” 남편의 말이다. 일과 관련된 고민을 ‘100%’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란다. 한 사람이 아파서 나오지 못한다고 해서 업소 문을 닫아야 하는 일도 없다.
반대로 단점은 주-종 관계가 아니라 의견의 충돌이 생길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란다. 대부분의 일은 서로 나눠하지만 장부정리나 협상이 필요한 일은 남편이 전담하고 있다. 부부는 코압 때 혹독한 서비스 훈련을 받았던 게 큰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박씨는 현재 ‘투잡’을 뛰고 있다. 파트타임으로 짬짬이 대형 안경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개업초기 고정손님이 없어 가게를 굳이 부부 모두가 지킬 필요가 없었던 탓에 직장을 구했지만 이젠 손님이 웬만큼 늘어나 곧 사업에만 전념할 계획이라고.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하고픈 말 한 마디씩을 물었다. “오순도순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함께 일하며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본질의 변화라고 생각하지 말고 너그러이 이해해달라”며 곱게 미소를 지었다.
김원태 편집부국장 anthony@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