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들어서 호치민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잊은 듯했다. 모든 회의에 참석하고 싶어 했고, 당 지도부에 이것저것 지시하고, 미국은 강력한 나라이니 전쟁에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나무라기도 했다.

또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남베트남의 동지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1969년 5월19일. 호치민이 이승에서 맞은 마지막 생일날, 당 지도부에 당부했다.

“조국이 통일되는 최종 승리의 날에 내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선물을 남베트남 인민들에게 주고 싶소.”

그 선물은 바로 남베트남 방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기회가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호치민은 아이처럼 졸랐다.

“투쟁에 나선 전사들과 동지들을 직접 만나고 싶소. 10분 아니 5분 만이라도.”

8월 들어 호치민 병세가 악화됐다. 숨쉬기도 어려워했고 심장박동은 불규칙했다. 혁명동지이자 측근인 총리 팜반동, 전 총서기 추옹친 등이 자주 찾아 전쟁상황을 보고하고 말벗을 해 주었다.

1969년 9월2일 9시47분.

관저 건너편 바딘광장에선 이제 막 독립 24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될 순간이었다. 국가 수뇌부들은 단상에서 쪽지를 받았다. 급보였다. 다들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hochimin46.JPG그 순간 혁명가 호치민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 영원히 잠들었다. 그가 말년에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남베트남 인민’들은 아직도 전쟁 한가운데 있었다. 적국인 미국의 언론들조차도 “세계 약소민족 해방의 영웅”이라는 타이틀로 호치민의 죽음을 기사화했다.

9월9일 아침 8시.

호치민은 투명 유리관에 누워 영원히 잠든 채 조국과 이별했다. 군중들은 조용히 광장을 빠져 나갔다. 모두들 슬프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인민의 돈과 시간을 장례식에 낭비하지 말라”는 유언대로 장례식은 엄숙하고 장중했지만, 딱 35분 만에 끝났다. 팜반동 총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관을 껴안은 채 격렬하게 흐느꼈다.

호치민은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다. 그의 사후 유물은 입던 옷과 읽던 책뿐 개인 소유재산은 단 한 푼도 없었다. 호치민 주석의 통치 스타일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숭배를 철저히 금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집단 지도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호치민이 죽은 뒤에도 베트남의 지도체제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아직도 미국과의 전쟁은 한창이었다. 전국민을 일치단결시키는 중심, 그건 바로 호치민이었다. 죽어서도 호치민은 그 중심에서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가 없었다.

국가 수뇌부는 회의를 거듭한 끝에 호치민 시신을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호치민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당 총서기 레두안이 말했다.

“아저씨의 유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국통일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에게도 호 아저씨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북베트남 지도자들이 호치민의 시신을 체제유지와 권력강화에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분명한 건 죽은 뒤에도 호치민은 베트남 국민의 정신적 지주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전선이 따로 없었다. 베트남 방방곡곡이 모두 미군의 적이었다. 미군은 심지어 “미군 주변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죽인다”는 끔찍한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패색은 날로 짙어갔다.


호치민 없는 베트남


이와 함께 부패로 찌든 남베트남의 응웬반티우 정부에 대한 국민 지지는 바닥이었다. 애초에 호치민 정신으로 무장한 북쪽 군대와 주민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북쪽 군대의 최대 강점은 포용력이란 평가마저 나올 정도였다.

북베트남 병사가 남쪽에서 포로로 잡히면 처참하게 살해됐지만 남베트남 병사가 북쪽의 포포로가 되면 호치민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감싸 안았다. 이들은 그대로 총부리를 미군에게 향했다. 미국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남베트남은 미군 없이는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었고, 미국은 결과가 뻔한 전쟁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개입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이었다. 미국 내 반전평화 분위기는 이미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73년 2월 마침내 북베트남과 미국은 파리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미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1975년 4월30일 마지막 미군이 떠나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11년간 남베트남을 통치했던 군인 출신 응웬반티우 대통령은 감춰두었던 금괴 2톤을 비행기에 싣고 대만으로 망명했다. 불과 이틀 동안 남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 자리를 지켰던 두옹반민이 국가수반으로 한 일은 취임과 항복이었다.

호치민이 평생 그렇게 원했던 완전독립과 통일은 그가 죽은 뒤 6년 만에 찾아왔다. 지금도 하노이 바딘광장 중앙에 자리 잡은 호치민 묘소엔 참배객들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서 있다.

(끝·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 조영권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