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lioz.gif지난주까지 연재했던 바흐부터 브람스까지는 클래식 음악의 정통성을 이어온 주류들의 계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독일계로 음악의 형식과 ‘순수’를 고수하면서 음악의 진화를 리드했던 작곡가들이다. 바로크시대와 고전파 시대의 음악은 주류의 물줄기였다. 베토벤 이후 낭만파시대에는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같이 순수음악을 지향하는 부류와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와 같이 창조적이고, 개혁적인 부류들, 그리고 쇼팽을 필두로 그리그, 시벨리우스, 스메타나, 드보르작등 민속 선율을 바탕으로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던 국민주의 악파들이 시대를 주도했다.

1824년 베토벤이 교향곡 역사에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합창> 교향곡을 발표한지 6년만인 1830년 프랑스의 청년 음악가 베를리오즈는 보다 획기적이고, 당시로는 전위적이기까지 했던 <환상교향곡>을 발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절대음악의 최고 형식이었던 교향곡 속에 표제적인 요소를 대폭 끌어들여 ‘이야기’를 덧붙였다. ‘합창’을 결합했던 베토벤 교향곡과는 또다른 신선함을 보여준 것인데, 당시에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베를리오즈는 18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소질을 보였으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의대에 진학해 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꾸준히 아버지를 설득하여 23세에 파리음악원에 다시 입학한 베를리오즈는 1830년 2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들석하게 한 <환상교향곡>을 발표한다.

이 교향곡은 2년전 짝사랑했던 영국의 여배우 스미드슨에 대한 연모의 결과물이었다. 문학청년이며 세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던 베를리오즈는 파리에서 공연된 세익스피어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및 ‘햄릿’을 보고 여주인공이었던 스미드슨에게 깊은 짝사랑 감정을 품었다. 그러나 당시 인기 절정의 여배우가 가난한 무명의 청년 음악가를 거들떠 볼리가 없었다. 실연이라기 보다는 짝사랑에 의한 일방적인 아픔을 겪으며, 깊은 고뇌 속에서 그는 불과 2개월만에 교향곡을 완성했다. <환상교향곡>은 마치 오페라처럼 주인공이 있는 스토리가 전개됨으로써 “표제교향곡”으로도 불린다. 베를리오즈는 1845년 출판된 악보에서 다음과 같은 표제를 직접 기록했다. “사랑에 번민하던 어떤 예술가가 격정적인 욕망의 발작을 참을 수 없어서 아편을 먹고 죽으려 했다. 그러나 아편의 분량이 적어 깊은 잠에 빠졌다가 꿈을 꾸게 된다. 그 꿈 속에서 예술가의 사랑이 재현되는데, 환상적인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환상속에서 연인의 선율이 나타나고, 그 선율은 고정적 관념처럼 모든 장면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예술가’는 베를리오즈를 말하고 ‘사랑’과 ‘연인’은 스미드슨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정관념’이란 교향곡 전체를 관철하는 중심주제를 말하는데, 보통의 교향곡에서는 1악장에서 나타난 주제가 그 악장에서 사라지고 마는데, 이 ‘고정관념’은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각 장면마다 등장한다. 이는 훗날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미쳐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f:지도동기)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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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리오즈가 짝사랑 했던 스미드슨

<환상교향곡>의 발표는 무명의 청년음악가를 세상에 알린 사건이 되었다. 당시 엇갈린 호평과 혹평으로 음악계가 떠들썩 했는데, 슈만은 그의 잡지를 통한 평론에서 “베를리오즈를 천재로 인정해야 할것인가, 아니면 음악적인 모험가로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모호한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어쨋든 <환상교향곡>은 베를리오즈를 유명인으로 만들었으며, 결국 그의 짝사랑에 의한 집착이 스미드슨의 마음을 사로잡아 1833년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7년만에 결혼은 파경에 이르고고, 훗날 베를리오즈는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

그는 <환상교향곡> 발표 후 이탈리아로 유학하고, 당시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를 만나서 그를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유일한 비올라협주곡인 <이탈리아의 해럴드>이다. <환상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줄거리가 있는 곡으로 ‘비올라 독주가 붙은 표제교향곡’으로도 불린다. 영국의 문호 바이런의 명작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어 주인공 해럴드를 통해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비올라 독주는 주인공 해럴드의 테마로, 전곡을 통해 여러가지로 변형되어 나타나면서 고정관념으로 사용하였다.

romeo_and_ruliet.gif그러나 이러한 혁신적인 작곡활동으로 인해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음악계는 그를 이단아로 규정하고, 그의 음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842년 39세에 이르러서야 벨기에와 독일에서 성공했고 슈만과 마이어베어를 만나 친분을 쌓기도 하였다. 이어 1847년에는 러시아에서, 1851년 영국에서 성공을 거둠에 따라 그는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에서 진가를 인정 받았다. 그는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동시에 작곡활동을 계속했고 음악평론을 겸하는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당시 모든 악기가 개량화되거나 현대화되면서, 지금의 오케스트라와 같이 대규모 오케스트레이션을 확립했다. 악기를 이해하고, 음색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그는 관현악의 규모를 지금과 같이 대담하게 확대시켰다. 그래서 그를 공연문화와 극장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표제음악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였으며, 이러한 개척정신은 훗날 리스트와 바그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평생을 이단아로 살아야했던 베를리오즈는 열망하던 스미드슨과 결혼에 성공했지만, 이어지는 이혼의 충격과 병약했던 자녀들로 인해 고뇌와 수심에 찬 괴로운 말년을 보내다가 1869년 프랑스 파리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의 음악을 외면했던 프랑스 음악계는 사후에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프랑스 최고의 음악가로 추서했다.


송정호 음악칼럼니스트 mikesong0713@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