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시’를 창안하고 새로운 형식의 피아노곡을 창작해낸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년 10월22일~1886년
6월30일)는 1811년 헝가리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 덕분에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리스트는 어려서 베토벤의 수제자였던 체르니에게 음악을 배우고, 이어 살리에리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822년 11살 때 빈(Vienna)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었는데, 연주를 보았던 베토벤은 “이 터키꼬마야, 넌 참 대단한
놈이구나”하면서 이마에 입 맞추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를 터키인으로 잘못 보았지만, 그의 특출한 재능만큼은 정확히
알아본 것이었다. 다음해 파리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지만, 보수적이었던 음악원은 외국인의 입학을 불허하여 결국 입학이 좌절되었다. 그는 오히려
파리에 체류하면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전개하여 파리사교계의 최고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1827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연주여행을 멈춘 리스트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는 이태리의 파가니니를 만나면서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어릴
적 체르니와 살리에리에게 체계적으로 배웠던 정통 스타일에서 파가니니처럼 초절기교를 구사하는 명기주의(名技主義)로 스타일을 전환하게 된다. 화려한
연주에는 항상 수많은 청중이 따랐으며, 리스트는 지금의 아이돌(idol)스타처럼 수퍼스타가 되어 버렸다.
이처럼 유명인이 된
리스트는 파리 사교계에서 베를리오즈를 만나 새로운 음악의 형식에 눈을 떴으며, 문학과 철학의 유명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훗날 ‘서사적인 관념’을
보다 자유롭게 음악으로 표현한 ‘교향시’를 창안해냈다. 프랑스 베를리오즈의 ‘표제음악’은 당시 음악의 형식을 따르면서 이야기를 교향곡에 접목한
것인데, 리스트의 ‘교향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뜻하는 바를 교향곡으로 만들어 낸 파격이었다.

1836년 리스트는
6살 연상의 유부녀였던 미모의 백작부인 마리 다구를 만나 열렬히 사랑하게 됐다. 그는 부인과 동거하여 세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이
사랑스러운 딸 코지마다. 그녀는 훗날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독일작곡가 바그너와 결혼, 아버지를 곤경에 처하게 했으나
결국 바그너 음악에 크게 공헌했다.
리스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피아니스트로서 자유로운 연주자로 지냈다. 사실 단조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1847년 36세 때 바이마르의 궁정 악장으로 취임하면서 ‘작곡가이며 지휘자 리스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무렵 러시아의
키예프에서 연주여행을 하던 중 카롤리네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러시아황실의 공주 카롤리네는 니콜라스공과 결혼했다가 파경에 이른 뒤였다.
카롤리네는 리스트와 결혼하기 위하여 니콜라스와 이혼하려 했으나 종교의식 허가권을 가진 로마가톨릭 교황청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에
불구, 바이마르에 정착해서 인생을 함께했다. 리스트는 “작곡에만 전념하라”는 카롤리네의 권유를 받아들여 피아니스트로의 활동은 접었다.
전업 작곡가로서 그는 ‘교향시’라는 새로운 형식의 곡을 발표했으며, 대표곡의 하나인 ‘헝가리 랩소디’는 1851년부터 3년간에
걸쳐 작곡했다. 또한 연주자의 한계에 도전하는 고난도의 기교를 요하는 화려한 피아노곡들을 작곡했고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을 비롯하여 오페라
아리아와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피아노로 편곡 연주하는 등 새로운 도전과 개척을 이어갔다. 리스스트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지휘자·작곡가, 교육가,
사회활동가로 폭넓게 활동했다. 당시의 바이마르는 리스트 숭배자들로 붐빌 정도였다.

1858년(47세) 바이마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1861년에는 카롤리네와의 정식 결혼허가를 받기 위해 로마를 다시 방문했지만 교황청은 끝내 거절, 그들의 동거는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그후
카롤리네는 종교에 귀의했고 리스트도 가톨릭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검은 옷을 입었다. 그는 신부가 되어 경건하게 지냈다. 1871년 60세 때
그는 고국 헝가리 왕으로부터 음악교육의 개혁을 의뢰받고 부다페스트음악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고국에서의 연주, 교육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딸 코지마의 남편이었던 바그너는 리스트의 사위가 되지만, 인생과 음악관이 닮은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만년의
리스트는 ‘종합예술’이라는 바그너의 이상 실현을 돕기 위해 마지막 전력을 다했다. “리스트가 없었더라면 바그너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평론가의
말은 이래서 나온 말이다. 그는 그만큼 바그너 음악을 적극적으로 옹호, 지원했다. 그런 연유로 1883년 바그너가 죽자 그의 슬픔은 컸다.
1886년 바그너 탄생 75주년을 축하하는 음악제가 유럽 각지에서 열려 리스트는 런던과 파리를 거쳐 독일의 바이로이트로 향하다가 도중에 폐렴에
걸려 이 해 7월31일 바이로이트에서 타계했다. 그리고 8개월 뒤인 이듬해 3월 리스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카롤리네는 자살을 선택함으로 리스트의
뒤를 따랐다.
리스트는 외향적이고, 적극적이면서도 따뜻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베를리오즈에게 꾸준히 도움을
보냈으며, 쇼팽을 파리 사교계에 소개했다. 그는 음악 동지인 바그너와 음악적으로 견해를 달리했던 슈만조차 세상에 알리는 데 힘썼다.
그가 평생 이루어 놓은 음악적 업적에 대해 “리스트 이전에 리스트 없었고, 리스트 이후에 리스트 없다”고 극찬하기도 한다. 이처럼
리스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퍼스타였지만, 사랑의 파경을 두 번씩이나 경험하고 만년에는 수도승으로 순례자의 길을 걸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음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