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극’을 창시한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22일~1883년 2월13일)는 작곡가이면서도 지휘자,
이론가, 수필가, 연출가, 건축가, 철학가, 혁명가로도 활동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굴곡 많은 인생을 산 음악가다. 그의 음악보다 그의 인생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한마디로 파란만장하다 못해 기구하기까지 하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의 음악만을 이야기하자고 한다. 행여 그의
삶 자체 때문에 그의 위대한 음악이 퇴색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게다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역경을 딛고 일어선 점, 혁명을
통해 독일의 이상주의를 꿈꾸었고 유태인들의 유대주의를 비판했던 점,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내용을 악극으로 창조했던 점과 이를 동경했던 히틀러가
이를 정치에 이용한 점(이 때문에 이스라엘서는 그의 음악이 최근까지 철저히 배척받았다). 이 때문에 인간 바그너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극명하게
대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그의 위대한 업적에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그너는 1813년
독일 라이프치히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생후 5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과 절망 속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작곡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 ‘C장조 교향곡’을 발표하면서 작곡가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3류 지휘자 생활을 비롯해서,
합창단 단장, 편곡자, 악보사 서기 등 음악과 관련된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가난과 싸웠고 불안정했던 밑바닥 생활에서
1836년(23세) 6살 연상의 여배우 미나 플라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가난으로 빚에 시달리면서 오페라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도망하여 오페라
‘리엔치’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작곡한다.
1842년(29세) ‘리엔치’가 드레스덴 오페라극장에서 상영된 것을 계기로 다시
독일로 돌아와 1843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자신의 지휘로 직접 초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궁정 오페라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계속해서 오페라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을 작곡하여 생활의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1849년(36세) 전 유럽에 몰아친
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그는 다시 위기를 겪는다. 혁명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지고, 궐석재판에서 사형까지 선고됐다. 그는 당시 유명한
음악가 리스트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그의 도움으로 스위스로 망명했다. 긴 망명 기간 중 그는 사색과 저술에 몰두했는데, 그가 지은 오페라들은
리스트에 의해서 독일서 계속 상연됐다.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 중 재력가 베젠동크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베젠동크의 부인이었던 15살
연하 마틸데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던 사랑을 ‘베젠동크 가곡집’과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담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니벨룽겐의 반지’를 구상하여 대본을 썼고, 작곡도 이때 이루어졌다.

1864년(51세) 추방령이 해제되면서,
그는 평소 자기를 숭배했던 바이에른의 젊은 국왕 루드비히 2세의 초청으로 독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바그너는 뮌헨에 정착하고 작곡에 몰두하여
악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니벨룽겐의 반지’를 완성한다. 1865년 뮌헨에서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상연되었고, 1868년 역시 뷜로의 지휘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가 초연되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866년(53세) 첫
번째 부인 미나 플라나가 세상을 떠나면서, 바그그너는 사상 초유의 스캔캔들을 일으켰다. 오랜 동지였던 작곡가 리스트의 딸이며,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이기도 한 코지마와 사랑을 나누었던 그는 그녀와 재혼하기로 결정하고 코지마가 이혼하기까지 4년을 기다렸다가
1870년(57세) 결혼했다. 이때 그에게는 코지마와의 사이에 이미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1869년에 출생한 지그프리트는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1870년 바그너는 아들의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하여 ‘지그프리트의 목가’를
작곡했다. 1871년(58세)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가 꿈꾸었던 이상의 실현에 힘을 실어 주었다. 속세에서 떠난 별천지에 오페라 극장을 만들고,
거기서 연기자와 관객이 일체가 되어 독일 오페라에 도취하자는 구상이었다. 마침내 1876년(63세)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완공하고 개관기념으로 대규모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전곡을 상연했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와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1882년
‘파르지팔’ 상연 후 요양 차 이태리의 물의 도시 베네치아(베니스)로 갔다가 이듬해인 1883년 2월13일 벤다르민 궁에서 한(恨)도 많고
영광도 많았던 70년의 생애를 마쳤다.
바그너가 직접 설계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원형으로 오케스트라의 자리가 무대 밑 지하에
자리하고 있어 음향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현재까지 이곳에서 매년 여름이면 그의 작품을 상연하는 바이로이트축제가
열린다. 이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해마다 열린 100년이 넘는 전통의 음악축제이며, “독일오페라를 상연하겠다”던 그의 의도와는
달리 바그너음악만을 상연한다. 축제 때 등장하는 관현악단은 해마다 독일 각지의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선정된 뛰어난 연주자들이 모여 축제만을 위해
연주하는 악단이다. 바그너 음악애호가들에게는 축제참여가 연례행사이며, 바이로이트는 그들의 순례지가 되어 버렸다.
바그너는 작품마다
매우 깊이 있는 철학적 요소를 담았고 음악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상적인 종합예술의 경지를 이룩했다. 그는 일반 오페라에 연극적 요소를
강화하여 ‘악극’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했고 이런 개혁정신은 현대음악의 출발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언제나 사랑과 평화에
대한 동경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전 작품을 통해 인간의 구원으로 승화한 위대한 작곡가였다.
베토벤 음악을 계승한 낭만파의 모든
작곡가들은 그의 음악 중 형식미를 중시하고 순수음악을 지양했던 보수파와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자유주의를 신봉했던 개혁파로 분리된다. 처음에는
이들이 계파를 이루고 대립하지는 않았다. 슈만은 생전에 ‘음악신보’의 발행인이었으나 자기와 음악관이 다른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를 결코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했던 야심가 바그너가 문제를 일으킨다. 그는 음악계를 장악했던 유태인들의
유대주의를 비판하면서 유태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을 폄훼했다. 바그너는 결국 멘델스존의 절친한 친구였던 슈만의 음악도 함께 혹평했다. 이때는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일방적 주장으로 그쳤다(바그너는 어렵게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로서, 소위 음악의
엘리트코스를 거쳐 바흐와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독일음악의 정통성을 계승한 멘델스존과 슈만에 대한 일종의 컴플렉스도 있었다).
바그너는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곡들을 발표하면서, 상대적으로 베토벤을 계승한다고 순수음악만을 고집한 멘델스존과 슈만을 비난했다.
예상치 못한 반론은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 슈만에게서 나왔다. 클라라는 자기 남편의 제자인 동시에 자신을 사모했던 브람스를 끌어들였다. 내성적이고
순수한 성품의 브람스는 논쟁을 외면하다가 클라라의 간청으로 바그너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논쟁은 정치적 성향의 바그너가 멘델스존과 슈만의
명성을 딛고 올라서 보려는 의도로 시작했다가 결국 표제음악과 절대음악의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리스트와 베를리오즈가 바그너를 동조했고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종합예술론을 주창한 바그너를 옹호했다. 바그너에게 아내를 빼앗긴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물론 브람스 편에 서서 바그너를
맹렬히 비난했다.
훗날 표현주의 음악을 표방했던 드뷔시를 위시한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가들과 베르디 등 이탈리아의 정통 오페라
작곡가들은 반(反)바그너를 외쳤다. 극명하게 대립하지는 않았으나 국민음악파들 중에도 스메타나는 바그너를, 드보르작과 그리그는 브람스 편에 섰다.
R. 시트라우스와 말러, 푸치니 등은 이들의 장점을 받아들여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음악관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