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haikovsky.gif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년 5월7일~1893년 11월6일)는 1840년 러시아에서 광산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늘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 주었던 어머니 덕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할 수 있었던 그는 이미 10세 때 작곡을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세에 사법성의 관리가 되었다. 안정된 관료 생활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잃고 공허하게 4년을 보낸 뒤,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1863년 23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 입학한다. 이 음악원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안톤 루빈스타인이 러시아에 최초로 설립한 정규 음악교육기관이다. 거기서도 재능이 드러나 그는 루빈스타인의 지도를 직접 받았다.

그는 졸업과 함께 스승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신설한 모스크바음악원(현재는 ‘차이콥스키음악원’으로 개칭, 명성을 이어간다) 교수로 채용되었다. 음악원 교수는 비록 안정된 직장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생계 걱정 없이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으며, 그는 루빈스타인 형제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시절 그는 운명의 장난처럼 너무나 상반된 영향을 주는 두 여인,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네데즈다 폰 메크 부인을 만나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14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어릴 적 사랑했던 가정교사와 헤어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강한 동경이 비뚤어진 여성관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법률학교 때 동성애적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지극히 내성적이었던 그에게 동성애자라는 컴플렉스는 평생 그를 괴롭혔던 강박관념이었다. 그는 여기서 벗어나고자 사랑도 없고 확신도 없는 무의미한 결혼을 선택한다.

1877년(37세) 그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고자 그를 열렬히 짝사랑했던 아홉 살 연하의 음악원 제자 밀류코바와 급히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파경에 이르렀고, 그는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밀류코바는 결혼 초기 그의 극심한 짜증에 대해 행복한 표정과 말투로 사랑스럽게 대했는데 이것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별거를 시작한 후에도 밀류코바는 끝까지 그의 부인으로 남기를 원한다면서 이혼을 거부했다. 그는 그녀를 평생 증오했고 그녀 또한 일종의 편집증을 보이며 그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를 괴롭혔다.

또 다른 여인이었던 폰 메크 부인은 9살 연상이었으며, 철도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업가의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 예술가들과 교류가 많았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에게 소품과 편곡을 의뢰하면서 짧은 서신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절대 만나지는 말고 서신 왕래만 할 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서로 모른 척 지나치는 관계를 지속하며 14년 동안 1,100통이 넘는 서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이렇게 평생 동안 플라토닉 러브를 나누면서 친밀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폰 메크 부인의 풍부한 경제적 지원으로 오로지 작곡에만 매진, 베토벤과 브람스에 견줄만한 6개의 교향곡과 ‘연주 불가능’이라고 평가된 3개의 피아노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3개의 위대한 현악4중주곡, 발레음악, 가곡, 오페라, 교향악곡, 교향시 등 다양한 장르에 보석처럼 빛나는 명곡들을 남길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하면 먼저 떠올리는 음악이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다. 그러나 이 곡은 초연 당시 혹평을 받았다. 주연의 캐스팅 문제 등 발레단의 문제가 더 많았지만, 필자는 그가 발레음악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그는 10년을 앞섰던 미래형 작곡가였다. ‘연주 불가능’으로 낙인찍힌 곡들은 연주자들의 테크닉을 향상시켜 지금은 모두가 사랑하는 최고의 협주곡들로 평가받는다. ‘백조의 호수’는 발레음악의 대표곡으로 자리한다. 발레는 본래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그곳에서 성행했지만, 지금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볼쇼이’를 꼽는 데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1890년(50세) 폰 메크 부인은 그에게 파산으로 인해 경제적 지원을 중단한다고 선언한다. 아울러 절교까지 제안하자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기댔던 그녀와의 이별은 심한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그때의 슬픔과 애수, 애환을 음악으로 승화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교향곡 6번 ‘비창’이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 버렸다. 그의 전작들처럼 1893년(53세) 초연 때에는 환영받지 못했으나, 며칠 뒤 콜레라로 그가 세상을 떠나자 두 번째 공연부터 사람들은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비장하리만큼 침통한 선율로 곡을 마치자, 청중들은 박수 대신 흐느낌과 통곡으로 위대한 음악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식당에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지만 2가지의 자살설도 있다. 폰 메크 부인과의 결별로 동성애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과 강박관념이 우울증을 부채질, 자살했다는 설과 그의 동성애로 인해 법률학교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해서 학교는 그에게 정신적 사형을 선고했고, 이로 인해 물에 콜레라 오염물질을 타서 자살했다는 주장이다.

그에게 좋든 나쁘든 영향을 미친 두 여인들도 그 후 슬픈 운명을 맞았다. 폰 메크 부인은 그의 죽음을 들은 후 견딜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지내다가 이듬해 폐결핵으로 생을 마쳤고 법적 부인이었던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그보다 24년이나 더 살았지만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베토벤, 브람스와 견줄 만큼 독일 고전주의의 정통성을 계승한다. 이뿐 아니라 러시아의 민속선율을 조화롭게 가미하여 러시아의 정신을 반영하기도 한다. 한편 타고난 그의 성격으로 인해 그의 음악에는 항상 깊은 애수와 어두운 면이 감돈다. 극히 세련되었으나 때로는 몽상적이고 서정적이기도 하다. 베토벤이 운명을 극복, 이를 음악적으로 승화시켰다면, 차이콥스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이것이 바로 차이콥스키의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