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파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독일 음악 줄기에서 벗어나 각 민족이 자기들의 문화와 전통을 반영한 음악을 창조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국민주의음악’ 또는 ‘국민악파’라고도 한다. 이런 음악들은 각 나라와 지방의 민속적 색채를 소재로해서 민족 자부심과 전통을 표현한다. 국민주의 작곡가들은 19세기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하면서 주목받았으며,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러시아 5인조,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체코의 스메타나와 드보르작, 노르웨이의 그리그 등이 있다.

smetana.gif먼저 체코의 대표적인 작곡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이들의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체코의 역사와 민족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체코는 유럽 중부에 위치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에서 번창했던 왕국을 뿌리로 한다. 이후 주변국인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독일의 침공을 받으면서 어려움을 겪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1526년부터 세계 1차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 무려 300여 년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 무렵 식민지 지배를 피해 떠돌아 다녔던 보헤미안의 후예들이 춤과 음악에 뛰어났던 집시들이다. 그후에도 히틀러 나치의 침공으로 독일 지배 밑에 있었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 위성국가가 되어 자유를 빼앗긴 뼈아픈 역사를 가졌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자유화 개혁운동이 추진되었으나 소련 탱크에 의해 좌절되었다. 1988년 동구의 자유화 바람을 타고 대망의 자유를 얻어 1992년 체코 공화국을 설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 한민족도 비슷한 피지배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체코의 민족음악은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체코의 국민작곡가 스메타나는 1824년 체코 보헤미아 지방에서 맥주 양조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세에 현악사중주단의 제1바이올린을 담당했고, 6세에 대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신동이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더이상 음악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성인이 된 20세에 이르러 서 비로소 수도 프라하로 가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프로크시는 스메타나의 재능을 인정하여 무보수로 그를 가르쳤다.

프라하는 아름다운 음악도시로 유명해서 세계 여러 유명 음악인들이 찾았다. 스메타나는 1846년(22세) 베를리오즈와 슈만부부, 리스트 등을 차례로 만났고 특히 리스트와의 만남은 그의 음악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리스트는 그의 작품이 악보로 출판 되도록 도움을 주었고 스메타나는 그를 평생 존경했다. 1848년(24세)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프라하에서도 6월 혁명이 일어나자, 민족의식에 눈뜬 스메타나는 국민의용군으로 가담하여 ‘국민의용군 혁명가’와 ‘자유의 노래’등을 작곡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하였고, 가혹한 억압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1849년(25세) 오랜 청혼끝에 카테르지나와 결혼했고, 억압을 피해 1856년(32세) 스웨덴으로 건너가 5년간 에테보리에 머물면서 음악학교를 세우고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이때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사랑했던 카타르지나와의 사이에 4명의 딸을 두었지만, 그 중 3명과 사별하는 아픔이 있었다. 이들을 추모해서 지은 피아노 3중주곡은 그의 처절한 슬픈 감정을 담았다. 1859년(35세) 아내 카테르지나의 죽음마저 지켜보아야 했던 그는 이 모든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이듬해 16세 연하의 베베티나와 재혼하고, 본격적인 작곡활동에 전념했다. 1860년대 오스트리아의 탄압이 느슨해진 틈에 체코의 민족운동이 되살아나자, 그는 스웨덴에서 프라하로 돌아와서 문인들과 손잡고 체코어로 된 오페라 창작운동을 일으키는 등 민족문화 운동의 선두에 섰다.

운명의 장난인지 1874년(50세) 귓병이 악화되어 갑자기 귀가 전혀 안들렸다. 그는 모든 공적 활동을 중지하고 은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50세라는 한창 나이에 작곡가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베토벤처럼 좌절 속에서도 운명에 도전하듯 마지막 2개의 위대한 작품을 역경 속에서 완성했다.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은 조국 체코의 자연과 전설과 역사를 6곡의 웅장한 교향시로 표현한 것. “스메타나”하면 떠올리는 아름다운 ‘몰다우’가 바로 ‘나의 조국’ 중 2번째 곡이며, 체코의 상징인 몰다우 강(체코어 표기 블타바 강)의 파도가 바뀌면서 넘실거리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들려주는 곡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현악 4중주곡 1번 ‘나의 생애로부터’는 1876년(52세)에 완성했다. 이 곡은 자기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음악에 담은 것으로 ‘혼의 고백’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곡이다. 젊은 날의 정열, 행복했던 회상, 민요적 멜로디를 사용한 기쁨, 민족의 힘, 청력을 잃은 충격과 슬픔, 인생에 대한 마지막 회상으로 전개되는 이 곡은 그의 모든 것이 담겨진 걸작이다. 그러나 프라하의 실내악협회는 “혁신적 형식으로 전개되는 형식은 불안정하며, 어렵기 때문에 도저히 연주하기 힘들다” 면서 연주를 거부했다.

청력상실에 겹쳐 건강마저 급속도로 악화된 스메타나는 60세가 된 1884년부터는 정신착란 증세마저 일으켜 급기야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절대로 작곡하지 말라”는 의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곡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불안정한 미완의 현악 4중주 2번을 작곡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에 몰두한 것이다. 그는 그해 5월12일 아무도 찾지 않는 정신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스메타나는 자신을 혁신가이며, 진보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주의 음악은 민요와 선율을 흉내내는 것만으로는 창조되지 않는다”면서 음악에서는 체코의 고유 멜로디를 사용하여 민족정신을 부각했으나, 오페라에서는 민요를 도입하지 않고, 정신적인 면에서 민족적 요소를 결합하는데 전념했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교향시 ‘나의 조국’에서는 리스트가 보여준 신독일파의 기법을 도입하여, 민족적 음악으로 재창조했다.

삶이 그처럼 힘들었으나 그는 “예술적인 사상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사람만이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말할 만큼 완전한 인간을 위해 노력한 음악가였다.

지금도 해마다 그의 기일인 5월 12일 프라하에서는 체코의 위대한 국민음악가를 기리며 ‘프라하의 봄 음악회’를 연다. 개막곡은 항상 ‘나의 조국’이다. 체코인들은 이 곡을 들으며 민족의식을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