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소개한 스메타나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체코의 전통음악을 세상에 알렸던 국민음악가라면, 드보르작(Antonin Dvorak, 1841년
9월8일~1904년 5월1일)은 체코의 국민음악을 완성한 세계적인 음악가였다. 스메타나는 리스트의 영향을 받고 교향시 ‘나의 조국’과 같은
독창적인 표제음악을 창작한 반면, 드보르작은 브람스의 영향을 받고 ‘신세계 교향곡’과 같은 고전적인 절대음악을 추구했다. 스메타나와 드보르작
모두가 보헤미아를 위하여 그 땅의 푸른 계곡과 산들을 찬미하고,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희망을 주었던 대표적인 체코의 국민음악가였지만, 살아온
삶과 음악관은 극명히 대비된다.
드보르작은 1841년 체코의 프라하 근교 작은 마을에서 정육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형제의
대가족으로 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지만, 울창한 원시림을 벗 삼아 대자연 속에서 소박한 시골 풍습과 체코 특유의 민요를 접하면서
성장한 드보르작은 집시들이 즐겨 다루던 바이올린을 취미로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1857년(16세)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2년 후에 졸업을 한 뒤, 자기가 다니던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지만, 어려운 생계를 위하여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연주자로도
일했으며,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대단한 노력형으로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주변의 음악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865년(24세) 드보르작은 자신의 제자였던 백작의 딸을 사랑하게 되어 청혼하였으나, 결국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녀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백작과 결혼을 해버리자, 실연의 슬픔을 표현한 가곡 ‘측백나무(Cypress trees)’를
작곡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8년 뒤인 1873년(32세) 모차르트가 그랬듯이, 드보르작도 실연의 아픔을 주었던 첫 애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고전적인 견실한 기초 위에 민족적 감정을 노래하고 있으며, 후에 스메타나에게
인정받으면서 더욱 민족주의에 기울어졌다. 그렇다고 스메타나의 음악을 모방하지 않고, 민족적인 감정을 독자적인 입장에서 표현하였다. 드보르작은
스메타나처럼 세련미는 없지만, 소박하고 생기에 차있었으며 박력과 정열이 넘친다.
1866년(25세) 드보르작은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에 재능을 보여 스메타나가 지휘하는 보헤미아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다. 당시 스메타나가 작곡한 오페라 ‘팔려간 신부’ 등을 연주하기도
했으나, 1871년에는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떠났다.
1877년(36세) 드보르작은 프라하의 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브람스의 도움으로 빈의 유명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보헤미아의 민속 음악을 주제로 한 ‘슬라브 무곡(Slavonic Dances)’을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나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먼저 유명해졌다. 독일 음악계가 보헤미아 사람인 드보르작을 차별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본
마리아의 고통을 표현한 ‘슬픈 성모(Stabat Mater)’는 영국에서 대성공을 이루었으며, 그는 영국으로 9번이나 초대받아 큰 환영을
받으면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여 발표했다. 그의 교향곡 7번도 영국에서 위탁받아 초연하였으며, 1891년(50세)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수여식에서 드보르작은 뉴욕욕 국민음악원장을 만났으며, 그녀는 드보르작을 원장으로 초빙하였다. 1890년부터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 이론과 관현악법 등을 가르치고 있었던 드보르작은 고심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 1892년에서 1895년까지 음악원장으로 지내면서,
3곡의 대표적인 걸작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미국의 여러 작곡가들과 흑인 음악가들을 만나 새 음악의 소재를 얻고, 이렇게 새로운
음악에 눈을 뜨게 되면서 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와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가
차례로 만들어 졌으며, 교향곡 9번은 1893년(52세) 자신이 직접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초연하였다.
흔히 ‘신세계 교향곡’으로 불리는 이 곡은 드보르작이 처음 붙인 제목처럼 고국 보헤미아(체코)를 그리워하면서 ‘신세계(미국)로부터’ 작곡한
곡이다. 드보르작이 이 곡을 통해 고국에 대한 향수와 애국심을 호소했듯이, 오히려 미국인들은 이 곡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1969년 미국의 우주비행사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을 때, ‘신세계 교향곡’을 듣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 곡은 인류가 최초로
우주에 전한 음악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곡을 초연했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008년 평양을 방문하여 역사적인 공연을 하였을
때에도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하였다.
드보르작은 미국에서의 마지막 해를 오직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보냈다. 당시 가눌
길 없는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며 작곡한 ‘첼로 협주곡’은 협주곡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역작이다. 1894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895년 2월까지 사이에 작곡되었으나 일단 고국으로 돌아간 뒤, 마지막 악장을 일부 수정하고서 1896년(55세) 그의 영국 방문 때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첼로 독주는 레오 스턴, 지휘는 드보르작 자신이었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가 고국 보헤미아의 토속적인 리듬과 미국 흑인
영가의 멜로디를 사용하여 애절한 망향을 노래하고 있다면 이 첼로 협주곡은 더욱 뼈아픈 보헤미아적 정서와 풍토를 보다 튼튼한 구성력과 넘치는
서정으로 이룩해 놓고 있다. 브람스가 이 곡을 처음 듣고는 “이와 같은 협주곡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왜 깨닫지 못했을까? 만약 알았다면
내가 직접 작곡했을 텐데...” 하고 극찬했다고 한다. 이 곡이 당시 얼마나 큰 감명을 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이 협주곡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독주 첼로의 뛰어난 구사에 있다. 첼로라는 악기가 지니는 낭랑한 음색과 남성적인 힘, 그리고 선율 악기로서의 특성을 이만큼
충분히 발휘한 작품도 드물다. 전곡에 흐르는 로맨틱한 느낌, 힘찬 박력, 당당하고 인상적인 멜로디, 그리고 드보르작다운 소박한 정감 등이 한층
더 친밀감을 북돋워 준다.
드보르작은 영국과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자 오스트리아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하였으며 프라하로 돌아와
1901년부터 190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라하 음악원장을 지냈다. 아마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음악계는 체코 출신의 드보르작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인이 되자, 그를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63세에 세상을 떠난 드보르작은 총 115개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드보르작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향곡과 실내악이다. 그의 작품은 견실한 고전적 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체코적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해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음악적 견해는 달리했지만, 스메타나에 의해 확립된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이 전 세계적으로 발전하고 사랑받게
된 것은 드보르작의 공이라고 하겠다. 어떠한 곤경에 처해있더라도 행복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그의 긍정적인 음악관을 서정적이며
민족적인 선율과 리듬에 의해서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드보르작 음악의 특징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