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파 후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러시아 음악의 출현이었다. 19세기 중반 국민음악을 통해 도약한 러시아는 이후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음악계를
주도하게 된다. 이렇게 러시아가 유럽의 변방에서 근대 음악의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5인조’라는 국민음악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러시아 출신의 알려진 음악가로는 글린카 정도였는데, ‘러시아 5인조’와 차이코프스키가 등장하면서 세계 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어 놓고 말았다. 이후 글라주노프, 스크라빈,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등 러시아 출신의 개성있는 천재 음악가들이
세계 음악계를 주도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찬란한 러시아 음악의 역사는 5명의 개성있는 작곡가가 조직한 ‘러시아
5인조’에서 시작되었다.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들리는 ‘러시아 5인조’는 비평가 퀴, 작곡가 발라키레프, 해군
사관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무소르그스키 그리고 의사이며 화학자였던 보로딘까지 이상 5명을 가리킨다. 이들 중 체계적으로 음악공부를 한 전문
음악인은 유일하게 발라키레프 한사람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본업이 따로있는 아마추어 음악인들이었다.
유일하게 정규음악 교육을 마쳤던
발라키레프는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1862년 일반인들을 위한 무료 음악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학교를 통해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양성에 힘썼다.
실제로 ‘러시아 5인조’의 나머지 멤버들을 이곳에서 혹독하게 가르쳤으며, 러시아 5인조라는 조직을 구성하고 이끈 리더였다.
퀴는
공병장교 출신으로 축성학의 교수이며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보로딘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겸 의사로서 명성을 떨치면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곡가였다. 자신의 환자였던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여, 평생 아내를 간호하며 헌신하였으며,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여 입양을 결심했고, 입양한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한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휴머니스트였다.
반면에 무소르그스키는 사관생도 출신으로 군의관이었던 보로딘을 만나, 러시아
5인조에 합류하게 된다. 발라키레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이후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하여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을 작곡하였다.
생활고에 때문에 체신부 관리로 일하면서 틈틈히 작곡활동을 하였다. 1865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심한 음주벽과 신경쇠약으로 주위로부터
소외되어, 1881년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알코올 중독에 빠져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여러 편의
피아노곡?교향곡?오페라?가곡 등을 작곡하였으며, 특히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의 유작 전람회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작곡한
<전람회의 그림>은 그림의 특징을 살린 러시아 풍의 생생한 음악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비록 그의 음악이 작곡기교면에서는
유치하였으나, 샘과 같이 솟아나는 즉흥적인 착상과 독창적인 개성을 지닌 대담한 화성, 변칙적인 리듬 등을 구사하는 기법으로 .드뷔시를 비롯한
많은 근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면서 근대 인상파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러시아 5인조’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역시 군인 출신으로 뒤늦게 작곡을 공부하여, 뛰어난 작곡 실력을 보여 준 음악가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풍부한 색채를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 민족음악과 예술음악을 결합시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신선함이 있다. 아마추어
음악가에서 최고 음악원의 교수가 된 그는 음악원 혁신에 가담하여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그의 작품이 모두 금지곡이 되는 수난도 겪게 되지만,
오히려 많은 학생들에게 존경과 지지를를 받게 된다.
각기 다른 독특한 개성으로 결성된 ‘러시아 5인조’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음악을
지키려는 소박한 생각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즉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독일 낭만파의 물결에서 벗어나, 볼품은 없지만 자신들의 음악을 지키자는
음악적 자존심에는 무엇보다도 자기 것을 사랑하자는 애국심과 아마추어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비평가였던 스타소프는 이들을
‘강력한 소수’로 극찬하고, 이 모임의 정신적, 이론적 지주로 평생을 함께 하였다. 유일한 음악 전공자였던 리더 발라키레프, 내성적으로 치밀한
성격을 지녔던 퀴,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이며 과학자와 의사로서 바쁘게 살았던 보로딘, 사고뭉치였지만 폭발적 야성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보여 준
무소르그스키,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뛰어난 작곡 능력으로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받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개성 강한 5명의 음악가들을 하나의
목표로 함께 협력하게 만든 사람 또한 스타소프였다.
이렇게 태동한 ‘러시아 5인조’가 해냈던 역할은 음악의 형식적 기능보다는
향토애와 자기 것이라는, 즉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예술적 휴머니즘 회복에 있었다. 그러나 목표가 뚜렷했던 만큼 기존의 전문 음악인으로
구성된 음악원으로부터 ‘형식도 모르는 아마추어’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당당히 대립했고, 러시아의 별로 불리는 차이코프스키에게는 ‘러시아는 없고
독일음악만을 계승한다’고 비난하면서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후 ‘러시아 5인조’는 개개인의 사유로 인해 뿔뿔히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된다.
생활고로 힘들었던 발라키레프는 엉뚱하게도 바르샤바 철도회사에 취직하면서 5인조를 탈퇴했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대립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위촉받고 5인조를 빠져나갔다. 보로딘은 의사였던 본업만으로도 사적인 시간을 갖기에 어려웠는데, 더하여 여성해방 운동에도 앞장서는 등
사실상 5인조에 지속적으로 합류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며, 평론가로 활동한 퀴는 5인조에서는 가장 지명도가 낮은 작곡가로 개성 강한
무소르그스키와는 상반되는 의견으로 늘 편치 않은 관계였다. 또한 무소르그스키는 알콜중독으로 단명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러시아
5인조는 확실한 악파로 자리매김을 한 것도 아니었고 결속력이 대단했던 모임도 아니었다. 단지 시대가 요구한 사회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양음악사에서 그들이 남긴 흔적은 지대하다. 러시아적인 그들의 음악은 부메랑이 되어 서구 유럽으로 다시 뻗어갔고, 인상주의 음악으로 계승,
발전되어 현대음악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5인조 모임이 불과 7-8년의 단명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모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남긴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구성된 러시아 5인조는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민족음악가로서 그 끝은
창대하였으니, 이들의 지역주의는 순수예술을 다시 회복시켰고, 독일 중심의 낭만주의에서 탈피하여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드뷔시의 인상주의 그리고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쇤베르크 등 현대음악을 태동시키는 역할을 해 내게
되었다.
송정호 음악칼럼니스트(mikesong0713@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