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세계 음악계를 주도한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중심에는 드뷔시와 라벨(Maurice Ravel, 1875년
3월7일~1937년 12월28일)이 있었다. 이미 소개했던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인 드뷔시보다 13살 연하였던 라벨은 1875년 프랑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시부르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사랑했던 스위스계 아버지와 스페인계 어머니는 음악가로 성장하는 아들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평생 어머니에 대한 강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가 들려준 스페인 민속 음악은 유년 시절의
라벨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스페인의 민족과 민속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스페인 음악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난 지 몇 달 후 가족 모두가 파리로 이사했기 때문에 그는 파리에서 주로 활동하며 생애를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특출한
음악 재능을 보여준 그는 1889년(14세) 파리음악원의 피아노 예과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화성악과 피아노에서 낙제하는
등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20세에 자퇴했다. 훗날 화성악과 피아노음악의 대가가 된 그에게 음악원은 젊은 날의 혹독한 시련의 추억으로만
남았다. 뛰어난 음악 재능을 지녔지만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학교는 그의 재능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선배였던 드뷔시가 최고의 성적으로
음악원의 엘리트 교육을 마쳤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평가였다.
2년간의 방황기를 보낸 뒤 그는 1897년(22세) 작곡수업을
위해 음악원에 재입학했다. 이때 그는 근대 프랑스의 섬세한 감각을 지닌 서정적인 낭만주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를 만났다. 이때부터 라벨은
작곡가로서 자유와 색채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면의 깊은 서정성과 고전적인 형식이 결합하여 새롭고 대담한 화성양식을
탄생시켰으며, 이를 발전시켜 점차 독자적인 스타일을 이루었다. 1899년(24세)에는 이색적인 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01년(26세)에는 물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음악으로 표현한 이색적인 피아노 곡 ‘물의 유희’를
작곡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음악원을 자퇴했던 경력 때문에 정작 음악원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1901년 로마대상에 도전하여 2등에
입상했으나 이후 5년간 로마대상은 그를 외면했다(로마대상은 프랑스음악원이 주도하는 상으로 베를리오즈와 드뷔시는 단 한 번의 도전으로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라벨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번번이 예선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1905년
로마대상의 최종 결선에서도 제외되자, 드뷔시와 구노와 같은 음악원 밖의 음악가들이 음악원을 비난하였고, 대문호 로맹 롤랑이 가세하여 이를 국가에
항소하는 등 라벨의 탈락은 커다란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심사위원들이 라벨을 외면하고, 자기 제자들에게 편파적으로 좋은 점수를 준 비리가
드러나자 파리음악원 교장은 해임되었고, 라벨의 스승이었던 포레가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라벨은 나이 제한으로 더 이상 로마대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에 정부가 나서서 로마대상 대신 레종 도뇌르 상을 수여했으나 라벨은 이를 정중히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더욱 강하게
항변하였다.
라벨은 드뷔시에게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음악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만의 독특한 감성의 멜로디를 사용하여 드뷔시와
차별된다. 그래서 드뷔시의 후계자이면서도 새로운 음악의 방향을 제시한 개척자로도 평가한다. 드뷔시의 음악이 심미미적 예술을 추구함으로 다소
모모호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면, 라벨은 고전적이고 이지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형식과 리듬을 중시하여 더욱 뚜렷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게다가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페인 음악의 향토색이 부합된 독특한 음악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스페인 공주의 죽음을 추모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정밀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스페인의 정서를 다채롭게 담은 교향시 ‘스페인 랩소디’, 아름다운 춤곡 ‘하바네라’, 하나의 멜로디로
변화무쌍한 관현악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스페인 춤곡 ‘볼레로’ 등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민속적 정서가 융합된
대표곡들이다.
1914년(39세)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라벨은 운전병으로 입대했다. 그리고 1917년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그리며 아름다운 추모곡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한다. 전쟁 중에 조국 프랑스의 대표 작곡가 쿠프랭의 위업을 찬양한 것으로
현대적인 수법으로 중세풍의 고전적 정취를 살린 아름다운 곡이다.
관현악에 통달, 관현악의 대가로 불린 라벨은 러시아 지휘자
쿠세비츠키로부터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곡 ‘전람회의 그림’을 오케스트라 곡으로 편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화려한 관현악의 기법이 돋보이는 곡을
완성한다. 프랑스 금관악기의 찬란함이 빛나는 관현악 편곡은 원곡인 피아노판을 뛰어 넘는 예술성으로 세상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자기 피아노
원곡들도 대부분 관현악곡으로 편곡, 원곡 판과 관현악 편곡 판이 존재하여 간혹 청중들을 혼동시켰지만 완성도나 예술성에서 모두가 뛰어났다. 이것이
라벨음악의 독특한 매력이다.

그는 생의 마지막으로 두 개의 뛰어난 피아노협주곡을 남겼는데 번호 대신 제목이 붙었다. 첫 번째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명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작곡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이다. 전체 1악장 형식으로
3부로 나누어진 이곡은 당시 유행했던 재즈음악의 효과를 사용하여 자유로운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한 손을 위해 쓴 곡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만년의 걸작품이다. 두 번째 곡은 상대적으로 ‘두 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으로 불린다. 이 곡은 1932년(57세)에
작곡한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관현악의 대가, 피아노의 대가답게 협주곡의 묘미를 완벽하게 살리며 고전에서 현대 재즈에 이르는 하나의 축도로
현대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라벨은 우수에 찬 아름다움과 우아하고 도회적인
품위를 가졌다.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라벨은 1932년(57세) 교통사고를 당한 후 충격으로 부분 기억상실증에 빠졌다.
상실된 부분은 안타깝게도 작곡 능력과 음악적 기억이었다. 그는 비관의 삶을 살다가 1937년(62세)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우아하고 섬세한 아름다움과 고상함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라벨은 음악원의 낙제생이었고, 자퇴생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프랑스가 사랑한 음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