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한다. 모든 것을 포용해야만 한다.”

mahler.gif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지휘자 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년 7월7일~1911년 5월18일)의 말이다. 음악을 통해 세상을 품으려 했던 그는 낭만파 시대의 끝자락에서 장대한 형식과 웅장한 사고를 구현한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 즉 ‘말러리안’들이 그를 지금도 적극적으로 열렬히 추종하는 이유다.

생전에 지휘자로 더 유명했던 때문인지 그의 작곡들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망 후 제자로서 지휘자인 브루노 발터와 발터의 제자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을 통해 그의 음악이 새롭게 알려지자 그는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생전에 ‘작곡도 하는 지휘자’ 정도로 알려진 그는 사후엔 ‘지휘도 잘했던 작곡가’로 재평가받는다.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작은 마을 칼리슈트에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50년이란 짧은 생애에 가곡 45곡과 교향곡 11곡을 작곡했다. 말러는 죽음에 집착하고 그 두려움으로 평생을 염세적이고 고독하게 살았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보면 영락없이 깐깐한 사상가, 혹은 고뇌하는 철학자의 모습이다. 거의 병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에 갇혀 살았고, 주위 사람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데 인색했다. 그의 괴팍한 성격은 어릴 적 우울한 가정사에서 비롯됐다. 아버지는 거칠고 폭력적이었던 반면 어머니는 자애롭고 우아했다. 삼중고(三重苦)의 아픔이 그를 평생 동반했다. 조국 오스트리아에선 보헤미안(집시)이라는 이유로, 주활동 지역이었던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았다. 이 때문에 말러의 음악에는 비애와 진지함이 깔려있고 고독 속의 암울한 철학적 질문들로 가득하다.

12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말러는 6세부터 피아노를 배워 15세에 비인음악원에 입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학구파였던 그는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 문학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을 섭렵하는 등 엄청난 독서량으로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그는 자신이 직접 쓴 시로 가곡을 작곡할 정도로 뛰어난 문인 재능도 있었다.

17세에 ‘교향곡의 바그너’로 불리며 독일정신을 계승한 브루크너의 강의와 연주를 듣고 그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으며, 23세에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듣고 역시 바그너 추종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훗날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바이로이트축제 관현악단 지휘직에서 쫓겨나는 등 바그너의 미망인 코지마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말러는 평생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최초의 직업적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와 근대 지휘법 창시자인 니키쉬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았다. 지독한 완벽주의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타협을 모르는 고집으로 단원들에게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와 함께 태생적 한계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다. 프라하,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에서 명지휘자로 활동했던 그는 1897년 비인 궁정 가극장의 정지휘자가 되면서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 명성을 얻었다. 말러는 1907년(47세)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초청으로 미국에서 상임지휘자로도 활약하였다.

이렇게 지휘자의 화려한 명성아래 조용히 작곡에 매진했던 말러는 1888년(28세) 교향곡 제1번 ‘거인’을 시작으로 총 11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는 장 파울 리히터의 시에 의거하여 제명을 붙이고, 이해를 돕기 위해 곡마다 표제를 붙였다. 그는 브루크너의 신비함과 리스트의의 표제음악이 결합된 새로운 로맨티시즘을 담은 표제악의 세계를 선보였다.

1889년(29세)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침통에 싸였고 1894년(34세) 존경하는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죽음을 당해 작곡에 몰두했다. 이때 지은 교향곡 제2번 ‘부활’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세계와 인간의 해방, 부활에의 동경을 담은 대합창교향곡이다. 독일의 시인 크로푸시토크의 시 ‘부활’에 곡을 붙였는데, 마지막 합창은 자신의 시로 마무리했다. 이 곡은 하프, 오르간, 교회의 종이 등장하는 대형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연주하는 거대한 작품이다.

ahlmar_schindler.gif동생이 권총자살한 사건을 겪으면서 작곡한 교향곡 제3번은 근대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900년(40세)에는 표제를 사용하지 않은 교향곡 제4번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화가 에밀 쉰들러의 딸이자 작곡가였던 알마 쉰들러와 사랑에 빠지면서 1902년(42세)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다. 말러보다 19세 연하였던 ‘바람의 신부’는 이미 아버지의 제자였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첫 키스’로 유명했으나, 말러의 적극적인 공세에 결혼을 허락했다. 말러는 이때의 사랑고백으로 교향곡 제5번을 완성했는데, 4악장의 감미로운 멜로디는 알마에게 바치는 곡이다.

결혼으로 두 딸을 얻었지만, 1907년 큰딸 안나의 급작스런 죽음은 그를 더욱 신경질적이고 강압적으로 변모시켰다. 말러의 음악에서 미스터리한 것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즐기면서 작곡한 작품에서 죽은 아이를 그렸고(1904년) 교향곡 제6번은 ‘비극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딸의 죽음을 예감한 듯이 죽음과 슬픔을 노래했다. 이 일로 해서 결혼은 파국으로 이어졌고 아내 알마는 다시 예술계로 돌아가 스캔들을 일으키며 말러를 괴롭혔다.

kiss_by_ahlmar.gif교향곡 제8번은 ‘천인의 교향곡’이라는 부제만큼 8명의 독창자가 나서는 등 800명에 이르는 대규모 혼성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거대한 교향곡이다. 방대한 규모 때문에 드물게 연주되지만, 이것은 교향곡의 대가인 말러 음악의 백미라고 평가된다. 그는 제9번 교향곡의 작곡 앞에서 주저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 브루크너와 드보르작이 모두 9번 교향곡 뒤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말러는 중국의 한시(漢詩)에 곡을 붙인 대합창교향곡을 완성하고 ‘9번’이라는 넘버 대신 유명한 ‘대지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10번째 교향곡에 앞서 제외했던 ‘제9번’을 붙여 발표한 뒤, 징크스처럼 1911년 5월 심장병으로 죽는다. 향년 50세. 9번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바로 착수한 10번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말러의 삶과 음악은 잿빛이었으나 그의 아름다운 멜로디는 잿빛을 가르는 파스텔톤의 가느다란 빛이다. 그의 이러한 로맨티시즘을 ‘신독일악파’라고 부른다. 고독한 현대인들은 그의 음악에서 성악과 염세적 철학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에게 열광하는 것이다.


송정호 · 음악칼럼니스트 (mikesong0713@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