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 EMI 뮤직에 근무 중인 후배로부터 세계 음악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피아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후배는 마침 한국을 방문한
그녀를 홍보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HJ Lim’으로 알려진 피아니스트 임현정.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후배가 보내준
프로필과 각종 자료들을 보면서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20대의 젊음으로 침체된 클래식 음악계에서 새바람을 일으키는 임은 누구의 도움 없이
‘유투브’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EMI 클래식을 통해 파격적인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데뷔 앨범으로 발매하더니, 새로운 세대의
음악 아이콘으로 등장한 ‘아이튠스’의 클래식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이튠스는
지난달 세계 2,200만 명이 구독하는 자기들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그녀를 소개했다. 또한 지난 5월22일 미국에서 발매된 데뷔앨범 ‘베토벤
피아노소나타’로 6월9일자 빌보드 클래식차트에서 한국인 최초로 깜짝 1위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임이 베토벤 소나타에서 보여준 지적인 분석과
감정적 몰입은 매우 신선하고 강력한 작품 해석으로 이어졌다”고 이례적으로 극찬했다.
임은 1986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로 26살. 3살부터 피아노를 시작했고, 중학교 1학년 때 ‘세계적 대 피아니스트’의 꿈을 품고, 홀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의
콤피엔느 음악원에 입학한 어린 소녀는 5개월 만에 음악원을 1등으로 졸업하고, 이후 루앙 국립음악원마저 3년 만에 조기졸업했으며, 프랑스 음악의
역사이자 자존심인 파리 국립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하여, 4년 과정을 3년 만에 마치고 최연소이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유럽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했고 한국가족들에게 자기 연주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연주회 동영상을 유투브에 올렸다. 그러던 중
2009년 벨기에의 바젤에서 있었던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연습곡 전곡 연주회에서 앙코르곡으로 연주했던 ‘왕벌의 비행’이 유투브에 오르자 25만
번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 일약 ‘유투브 스타’로 떠올랐다.
세계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임은 전설의 피아니스트인
아쉬케나지와 폴리니 등이 소속된 클래식 매니지먼트회사 ‘해리슨 패롯’과 연주계약 후 더욱 활발하게 활동을 펼쳤다. 정경화, 사라 장, 장한나,
임동혁 등 뛰어난 한국인 연주자들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둔 115년 전통의 클래식 명문 ‘EMI 클래식’은 부사장 앤드류 코넬을 연주장에
파견했다. 코넬은 임에게 “오늘 연주한 곡들을 그대로 녹음하자”며 음반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베토벤 소나타 연구에 몰두한 임현정은 “이를
먼저 발매한다면 계약하겠다”고 당차게 역제안을 해, 결국 소나타곡이 데뷔앨범으로 등장했다.
유투브에 있는 그의 동영상은 뛰어난
테크닉으로 유명한 ‘왕벌의 비행’뿐만이 아니다. 어느 곡이나 손쉽게 요리해내는 탁월한 기교, 독특한 개성과 그녀만의 카리스마가 인상적으로
두드러진다. 특히 코넬 부사장이 제안한 라벨과 스크랴빈의 연주를 유심히 보면 프랑스에서 공부한 영향일까? 프랑스 피아니즘 특유의 즉흥과 개성이
전면에 나타나는 고풍스러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애초에 EMI가 원했던 만큼 이 곡들은 2집 앨범으로 결정되었고 코넬 부사장이 직접 프로듀서를
맡아 녹음까지 마쳤다고 한다.
필자는 후배의 설명을 들으면서 매우 흥미로웠지만 베토벤을 데뷔앨범으로 선정한 점에 대해서는 걱정이
앞섰다. 줄리어드음대 교수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의 아버지는 “영주가 40세가 넘기 전전에는 절대로 베토벤을 연주시키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철학을 연주로 담으려면 인생의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후배에게 우려를 표명했는데,
후배는 영상들을 보여주면서 필자의 선입견을 종식시켰다. 임이 연주하는 베토벤은 그녀만이 지니고 있는 신선함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베토벤 음악이
지닌 특유의 무거운 철학에 주눅 들지 않고 베토벤의 젊음을 그녀의 당당한 패기로 들려주는 특히 초기의 소나타들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오히려
베토벤이 말년에 작곡한 후기 소나타들에 대해서는 우려가 기대로 바뀌는 신비스러움이 있었다.
3천 페이지에 달하는 베토벤의 편지를
읽었고, 구할 수 있는 베토벤의 관련 서적들을 모두 탐독하면서 베토벤에 미쳐버렸다는 임에게 소나타 전곡은 결코 미룰 수 없는 도전이었던 것이다.
원래 32개의 소나타를 19번과 20번을 제외한 30개의 소나타로 담은 것도 그녀가 가진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제외된 두 곡은 원래 베토벤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다. 생활고에 시달렸던 베토벤은 곡을 출판사에 팔아버렸지만 본인 자신은 이 곡들이 전체 소나타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임은 전곡을 30개 곡으로 추리고, 이를 다시 8개의 주제로 분류해서 8장의 CD에 담았다. 이 때문에 첫 번째 음반의 첫
곡은 소나타 1번이 아니라 29번 ‘해머클라비어’로 시작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임현정은 전곡에 대한 작품해설을 직접 써서 북클릿에 담았고,
데뷔 연주자가 프로듀싱까지 맡는 담대함과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24살이라는 최연소 나이에 녹음하고 데뷔음반으로 발매했다는 기록이 문제가
아니다. 더 관심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작곡가를 바라보는 젊은 연주자의 자신감이다.
‘베토벤을 향한 흠모가 사랑으로, 그리고
열정으로 바뀌어가는 대장정’으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3번이나 베토벤의 피아노 전곡 녹음을 남긴 피아노의 거장 알프레드
브렌델처럼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연주인생에서 이제까지와 다른 새로운 베토벤의 등장을 기대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계
피아니스트 랑랑은 연주도 좋지만 화려한 쇼맨십과 무대매너가 일품이다. 그가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그의 연주회에는 놀랍게도
중국인들이 객석을 가득 메운다. 랑랑의 성공에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중국인들의 힘이 뒷받침하는 것이다.
오직 혼자의 힘으로
신데렐라가 된 임현정의 성공은 스타를 기다리는 세계음악계에 활력소로 작용한다. 또 한 명의 세계적인 한국인 연주자의 탄생은 가슴 뿌듯하다.
그러나 세계적 반열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데는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일 것이다. 우리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끊임없는 격려가 필요한 이유다.
송정호 · 음악칼럼니스트 (mikesong0713@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