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Bach)부터 시작한 음악의 역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그 이전, 비발디(Vivaldi)로 대표되는 바로크음악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였고 이탈리아 음악은 서양음악사의 한 축으로서 계속해서 큰 영향력을 과시했다. 바흐와 헨델도 그 영향을 받았으며 모차르트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독일적 특색을 가미하여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마술피리’ 등의 걸작 오페라를 작곡했다.
베토벤 이후
낭만파 시대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국민주의 음악’의 열풍은 나라와 민족의 고유 민속선율들을 음악과 결합시키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특히 오페라 분야에서 특출한 작곡가들이 등장, 오페라 전성시대를 열었다.
원래 오페라는 르네상스 말기인 1597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지금의 ‘Florence’)에서 고대 그리스극의 부활을 목표로 시작된 것을 기원으로 한다. 1637년 피렌체에 최초의 오페라
극장이 개관되고, 오페라가 베네치아와 나폴리로 확산됐다. 오페라는 이탈리아 귀족들의 대표적인 문화였다. 오페라의 인기는 17세기 들어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로 번졌다. 헨델과 모차르트도 여러 개를 작곡했고 베토벤은 단 하나 ‘피델리오’를 남겼지만 이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오페라가 지금 같은 대중의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세기 초였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났던 로시니와
도니제티, 벨리니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의 3총사다. 벨칸토 창법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관현악을 확장하면서 이들이 확립한 오페라 양식은 베르디와 푸치니, 레온 카발로, 마스카니로 이어지면서 낭만파 오페라의 꽃을 피웠다.
로시니(Gioacchino Rossini, 1792년 2월29일~1868년 11월13일)는 즐거움이 가득한 음악에 화창한 음색과
아름다운 선율을 종횡으로 엮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로시니는 1792년 동부 연안의 페사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극장의 트럼펫
연주자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여가수였던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어려서 합창단에 입단했고 1807년(15세) 볼로냐의
리세리오음악원(현 로시니음악원)에 입학하여 극작법을 공부했다. 재학 중 작품인 단막 오페라 ‘마드리모니오’가 베네치아에서 상연되었고,
1813년(21세)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의 발표로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다.
1816년 로마에서 상영된 대표작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불과 24세에 쓴 작품이다. 유명한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전편에 해당하는 이 작품이 상연되자 유럽의
음악계는 로시니 열풍으로 들떴다. 그의 오페라는 빈을 시작으로 파리, 런던, 베를린 등지로 파급됐다. 특히 빈에서의 로시니열풍은 베토벤의 역작
‘합창교향곡’을 압도했다. 런던에서는 최고의 작품료를 받았다. 청년 로시니의 인기가 거장 베토벤을 압도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1829년(37세)에 작곡한 또 다른 역작 ‘윌리엄 텔’은 그해 내내 파리에서 장기 상연됐다. 그러나 그는 37세 이후
이상하게도 오페라에서 손을 떼었고 단지 미식가로서 음식평론에만 주력했다. 그는 간간히 종교음악과 실내악들을 작곡하다가 1868년 11월 폐렴으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76세였다.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1797년 11월29일~1848년 4월8일)는
1797년 베르가모에서 음악과 무관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을 전당포 관리인이었던 아버지는 가업을 계승시키려 했으나 그는 음악공부를
고집해 볼볼로냐음악원에 입학했다. 처음엔 가곡과 종교곡 등을 쓰다가 로시니의 영향을 받아 오페라 작곡가가 되었다. 선배 로시니를 존경한 그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효과적이고, 극적인 박력을 자유롭게 가미했다. 1830년(33세) 오페라 ‘사랑의 묘약’, 이듬해 ‘루크레찌아 보르지아’,
이어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연달아 발표하여 국내외에서 명성을 높였다. 계속해서 ‘연대의 아가씨’ ‘돈 파스콸레’ 등으로 인기의 절정에
올랐다. 50년의 생애에 67곡의 오페라 외에도 많은 성악곡과 기악곡을 작곡하였다.
도니제티의 특징은 관현악법의 결함을 보충하고도
남을 극적인 박력과, 선율의 아름다움에 있다. 그의 오페라는 명가수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작곡되었기 때문에 성악의 기교를 한껏 과시한다. 루치아의
유명한 ‘광란의 아리아’에서 그 전형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사랑의 묘약’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감미로운 멜로디의 창작에도
뛰어났다.
마지막으로 오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한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년 11월3일~1835년
9월23일)는 1801년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고 뒤를 잇는 듯 벨리니 역시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나폴리음악원에서 입학하여 음악적 역량을 키워 나갔다. 청년시절 나폴리의 대 재판관의 딸과 결혼하고자 했으나 완강한 집안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 경험은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1825년(24세) 재학 중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를 작곡했는데, 완벽한
형식을 갖춘 오페라로 평가받아 이탈리아를 떠나 외국으로 간 로시니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이어 벨리니는 10편의 오페라를 연달아
발표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고혹적이고 병약해 보이는 외모는 낭만문학의 주인공을 닮아 밀라노 사교계 여성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파리에 있던 로시니의 초대로 파리 사교계로 진출했다. 이때 자신과 스타일이 흡사하고 자신의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쇼팽과 친분을
쌓게 된다. 여기서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을 위해 마지막 오페라 ‘청교도(1835)’를 발표했다. 벨리니는 이 오페라를 프랑스 황후에게 바치고
기사칭호까지 얻었다. 이처럼 파리에서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대장질환에 걸려 1835년 9월 친구의 별장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았다. 불과
34세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몽유병 여인’ ‘청교도’ ‘노르마’를 꼽는다. 그의 작품은 도니제티처럼 아름다운 멜로디가 생명이다.
그러나 매우 어려운 기교가 있으며 깊은 정신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1829년 로시니의 은퇴로부터 1842년 베르디의 실질적인 데뷔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군림했으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