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소개한 로시니와 도니제티, 벨리니는 낭만파 초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오페라의 삼총사였다. 이들은 화려함과 뛰어난 기교를 요하는 벨칸토 창법을 도입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양식을 확립했다.

‘벨칸토(bel canto: 아름다운(bel)+노래(canto))’란 18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이탈리아 오페라가 애용한 화려하고 기교적 창법을 뜻한다. 그저 우아하고 서정적으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성악가가 발휘할 수 있는 극한의 기교를 총동원해 부르는 것이다. 벨리니와 도니제티의 잊혔던 벨칸토 오페라들을 부활시킨 사람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였다. 칼라스는 벨칸토를 ‘목소리를 악기처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제어하는 기법’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음악과 가수가 중심이었던 오페라는 19세기 후반부터 극장 규모가 커지고, 오페라의 소재와 작곡방식이 극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종합예술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따라서 벨칸토 창법은 쇠퇴하고, 안정감과 큰 음량을 요구하는 창법이 벨칸토를 대신한다.

이렇게 문학, 음악, 연극, 미술, 무용 등의 여러 분야가 하나가 된 오페라를 처음 기획하고 언어와 음악이 결합하는 방식이나 무대연기의 비중을 깊이 고민했던 작곡가가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였다. 그는 음악 못지않게 연극적 요소들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선구자였다.

verdi.gif독일의 악극을 창시한 바그너가 출생했던 1813년, 또 한 사람의 오페라 거장 베르디가 이탈리아의 부세토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여인숙집 아들로 태어났고 주위 환경 영향으로 농민다운 소박한 기질을 지녔던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강했다. 바이올린이나 교회의 오르간 소리에 마음이 끌려 7세 때 성당 미사를 반주하고 10세 때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마을의 음악가동지회장 바레찌의 후원으로 정식 음악을 배우고, 지휘자 라비나에게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은 베르디는 1836년(23세) 은사인 바레찌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고 밀라노에 정착했다. 26세 때 최초의 오페라 ‘오베르토’를 작곡하여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내와 두 아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음악조차 단념하려 했다. 다행히 친구의 격려로 힘을 얻어 오페라 ‘나부코’를 작곡한 이후 차차 이름이 나서 ‘롬바르디 사람’ ‘에르나니’ 등 애국적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계속해서 4년 동안 4개의 오페라를 썼다. 이후 38세 때 ‘리골레토’를 베네치아에서, 39세 때 ‘일 트로바토레’를 로마에서 발표하고, 40세에 ‘라 트라비아타’를 베네치아에서 발표, 3대 대표작 오페라를 3년 동안에 완성한다. 이 무렵 베르디는 소프라노 가수 주제피나 스트레포니와 동거했다. 베르디의 첫 오페라부터 계속 출연했던 그녀와 베르디는 점차 가까워지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베르디와 동거 전 주제피나는 테너 가수의 정부였는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에 감명받아 베르디에게 이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 것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결국 베르디는 사랑하는 동거녀를 모델로 ‘라 트라비아타’를 만들었으나 초연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유는 시대상황이 과거가 아닌 당시(현재)를 묘사하여 파격적이었으며, 여주인공의 사회적 지위가 창녀라는 점도 큰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가수들에게도 있었는데, 테너 알프레도 역은 감기에 걸려 있었고, 베이스 제르몽 역은 단역이라 연습을 게을리 했으며, 주인공 비올레타 역은 뚱뚱한 소프라노가 맡았기 때문에 결핵으로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청중은 급기야 웃음음까지 터뜨렸다고 한다. 베르디는 초연 실패 후 친구에게 “이 실패가 나 때문인지, 가수들 때문인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베르디의 예언처럼 가수들이 교체된 두 번째 공연부터 베르디 음악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이끌려 청중은 차츰 호감을 가졌고 오늘날 비제의 ‘카르멘’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후 고향 부세토 근교의 농원으로 거처를 옮긴 베르디는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시몬 보카네그라’ ‘가면무도회’를 연이어 창작하여 ‘비바 베르디(베르디 만세)’를 유행시키며 전 국민의 신망을 받았다. 1859년(46세) 동거녀 주제피나와 정식 결혼했고 이듬해 카르부 총리와 정부요인의 적극적인 천거로 초대 의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5년간 직함만 가졌을 뿐 정치활동보다는 오히려 오페라 ‘운명의 힘’을 러시아에서 초연하는 등 창작을 이어갔다. 5년 뒤 오페라 ‘돈 카를로’를 발표했을 때 그는 이미 ‘이탈리아의 베르디’가 아닌 ‘세계의 베르디’가 되어 있었다.

1869년 11월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수에즈운하가 개통되면서 이집트의 국왕은 수도 카이로에 가극장을 세우고 개관공연 작품을 베르디에게 의뢰한다. 처음에 베르디는 2차례나 거절하였지만, 프랑스의 유명한 이집트 학자인 베이 교수가 이집트를 무대로 쓴 4페이지 분량의 이야기에 깊은 영감을 받아 의뢰를 흔쾌히 수락하여 1871년(58세) 베르디 오페라의 집대성으로 불리는 불세출의 대작 ‘아이다’를 카이로에서 초연하여 뜨거운 찬사를 받는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그의 예술에는 나이가 없었다. 지난날 대립각을 세우고 비판했던 바그너의 관현악법을 60세가 지나 연구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그는 이를 원용하여 ‘사자를 위한 미사곡’ 등의 걸작을 남겼다. 1887년(74세) 불멸의 대작 ‘오텔로’를 썼으며, 1893년(80세) 최초이면서 최후의 희가극 ‘팔스타프’를 작곡하고 은퇴했다. 그는 1901년 만인의 존경과 애도를 받으며 행복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였다.

베르디는 로시니를 계승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했고 이를 푸치니에게 계승시켰다. 쌍벽을 이뤘던 바그너는 소재를 재구성하고 대본을 직접 쓰면서 오랜 세월 일관된 주제에 집중했던 반면, 베르디는 끊임없이 새롭고 다양한 소재를 추구하며 위대한 고전문학과 훌륭한 대본을 오페라로 재창조했다. 셰익스피어(맥베스, 오텔로), 쉴러(루이자 밀러, 돈 카를로), 빅토르 위고(리골레토), 알렉상드르 뒤마 2세(라 트라비아타),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일 트로바토레) 등 영국, 독일, 프랑스, 스페인 문호들의 걸작이 베르디의 오페라로 새롭게 태어났고, 고대 이집트(아이다), 기원전 바빌로니아(나부코), 중세의 마녀사냥(일 트로바토레), 파리 부르주아 사교계(라 트라비아타) 등 다양한 역사적 배경이 베르디의 무대가 되었다.

la_scala_theater.gif

“작곡가로서 나는 평생 완벽을 추구했다. 그러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내게는 분명 한 번 더 도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늘 남아있다.” 오페라 작곡을 시작한 이래 50년이 넘도록 비련의 여주인공들에게 고통과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한 베르디가 여든이 다 되어 한 말이다. 그는 총 28개의 오페라 중, 27개의 비극과 단 한 개의 희극 ‘팔스타프’를 남겼다.

베르디는 오페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음악가였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주요 인물이자 뛰어난 박애주의자였다. 초대 의회의원을 지내면서 저작권법의 개혁을 주도했으며, 세상을 떠난 뒤 20억 원 상당의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은 그를 존경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그가 남긴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는 스칼라 극장에서 영원히 울려 퍼진다.


송정호 · 음악칼럼니스트 (mikesong0713@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