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을 전후해서 라디오에선 감미롭고 흥겨운 추억의 음악들이 자주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퍽 낯익었다. 16일은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되던 날이었다. 해마다 8월이면 간간히 그의 히트곡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올해는 더 요란했다. 갈수록 그의
인기는 올라가는 모양이다. 그의 고향 멤피스에서는 10일부터 18일까지가 ‘Elvis Week’여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대형 콘서트도
열렸다. 생전의 연주실황을 여러 개의 스크린을 통해 연출하여 그가 실제로 공연하는 듯한 생동감을 주는 하이테크 무대였다. 한국에도 엘비스박물관이
있고 비슷한 형태의 추모 35주년 콘서트가 당일 열렸다. 세계 각지의 엘비스박물관은 팬들의 순례로 만원을 이루었다. 2년 전인 2010년은
엘비스 탄생 75주년이었고 그때도 엘비스 열풍은 전세계에 불었다.
살아있다면 올해로 77세이므로 그에게 열광했던 당시의 10대
소녀들도 이제 60, 70대의 할머니들이 됐다. 그러나 그의 행사에는 아직도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모인다. 그가 없어도 그의
음악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엘비스 애런 프레슬리. ‘제왕(The King)’이라는 별명처럼 그는 팝음악의
역사에서 길게 기술된 인물이며, 대중문화사적으로 보면 가수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선도한 최초의 수퍼스타였다. 빌보드 차트 10위권 안에 36곡,
1위에 17곡을 올렸고 미국 내에서 1억 장 이상, 전 세계 10억장 이상의 음반이 팔렸다. 이 기록에 버금가는 음악인은 영국 ‘비틀스’뿐이다.
그의 흑인창법은 한때 “흑인음악을 훔친 백인가수”라는 비난과 “흑인보다 흑인음악을 더 잘 부르는 백인가수”라는 찬사를 함께 받게 했다.
백인우월주의를 부추기기도 했지만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절에 그나마 그의 인기 덕분에 흑인 음악인들의 운신 폭이 더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평도
있었다.
그는 1935년 1월8일 미국 미시시피주 투펄로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쌍둥이였으나, 형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외아들로 자랐다. 아버지는 밀주혐의로 감옥을 드나든 전과자였고 어머니는 목화밭이나 공장에서 일해 생계를 책임진 남부의 가난한 백인이었다. 음악적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무능하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그는 어머니에게 의존하면서 성장했다. 1948년 가족은 테네시주
멤피스의 빈민가로 이사했고 엘비스는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낮에는 트럭운전 일을, 밤에는 술집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돈독, 1953년 어머니 생일을 맞아 음반을 만들어 어머니께 선물했다. 쌈짓돈을 털어 만든 이
음반에는 달랑 두 곡만 수록되었다. 이 과정에서 녹음을 담당한 선스튜디오의 샘 필립스 사장에게 발탁되어 가수의 길을 걷는다. 나팔바지와
가죽점퍼의 화려한 의상과 구레나룻 등 파격적인 스타일로 유명한 그는 데뷔 초기부터 외모에 신경을 썼다. 금발이었던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짙은 화장으로 당시 인기배우 말론 브란도나 제임스 딘과 같은 반항아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여 10대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10대 팬을 대중음악의
중요한 소비계층으로 만든 장본인이며, 오빠부대의 원조였다. 1954년 멤피스 방송국을 통해 그의 노래가 처음으로 전파를 타자, 방송국에는 엽서와
전화가 폭주했다. 성공적인 데뷔로 입지를 넓혀가던 엘비스는 초기에는 영화를 통해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는 1956년부터 1961년까지
총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이 뮤지컬이나 노래를 소재로 삼은 것들이었는데, 짧은 기간에 급조된 탓인지 모두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가수로서의 인기는 높아 흥행에는 모두 성공했다.
장밋빛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는 58년 3월 군대에 입대해서 머리를 깎았다.
1960년까지 2년간의 군 복무 기간 중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어머니의 사망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은둔과 기벽,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이때 연인 프리실라 블라우를 만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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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첫딸 리사 마리를 얻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프리실라 부부 |
1960년 전역한 엘비스는 여전한 인기를 누렸지만 큰 슬럼프를 겪는다.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고 영화에만 간간히
출연하면서 멤피스에서 호화파티로 세월을 허송했다. 그러나 1967년 프리실라와의 결혼은 그의 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 외동딸 리사
마리가 태어나자 그는 역사적인 컴백무대로 팬들에게 돌아왔다. 이 소식은 전세계 외신으로 보도됐다. ‘The King’으로서의 면모는 여전해서
그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1972년, 5년 만에 부부가 파경을 맞으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덜기 위해 약물에 의존했다. 이듬해 엘비스
최고의 공연으로 손꼽는 하와이 공연은 인공위성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될 정도였다. 그는 다시 한번 수퍼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상태는 이미 한계선에 있었다. 약물남용은 점점 더 강력한 약을 요구했고 그의 몸은 무너져갔다. 이로 인해 한 해 동안 네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1977년 8월16일 엘비스는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다. 병원으로 급송됐으나 그는
이미 이세상사람이 아니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약물이 주원인이라는 통설은 당연했고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애도했다. 오늘날 멤피스는 전세계
팬들의 순례지이며 연간 7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다.
트럭운전기사였던 가난한 엘비스는 가수가 되려는 집념에는
성공했으나 성공 뒤에 찾아온 공허 속에서 결국 너무 일찍 죽음에 이르렀다. 가스펠 앨범 ‘He Touch Me’로 3번째 그래미상을 수상한 뒤에
“가스펠을 부를 때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는 신앙으로 어려움을 다소 극복했으나 약물복용은 42년의 짧은 삶에 마침표를 찍게 했다.
인종차별 시대에 살면서 흑인의 전유물 가스펠(기독교복음노래)과 블루스를 흑인보다 더 잘 불렀던 엘비스는 흑인 코러스들과 함께 열정적인 무대를
펼치며 흑과 백이 하나가 되는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지난주는 이처럼 천부적인 음악 재능, 뛰어난 외모와 화려한 춤, 감각적인 유머는 물론
매혹적인 무대매너에 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치는 당당함마저 갖추었던 그를 밀레니엄 스타로 기리는 주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