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처럼 나타난 로시니의 열풍으로 시작한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벨칸토 창법으로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한 도니제티와 벨리니를 거쳐 이를 종합예술로
승격한 베르디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문학의 깊이와 연극의 재미, 음악의 감동을 담아 청중을 매혹시키는 이탈리아식 전통이 다져진 것은 이
시기였다.
당시 음악계는 위대한 음악가 베르디의 후계자에 대한 관심이 부풀어 있었다. 이때 등장한 작곡가가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으로 유명한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년 12월23일~1924년 11월29일)였다. 푸치니는 베르디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베르디가 확립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베르디와 대립했던 바그너의 악극을
수용한 푸치니의 오페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 평론가와 청중 모두에게서 인정받았으며,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오페라 작곡가로
사랑받는다.
푸치니는 1858년 루카에서 출생했다.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홀어머니의 적극적인 교육열이 집안의
도움을 이끌어내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0세때 교회의 합창단원, 14세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고 20세 때 졸업작품으로 '미사
글로리아'를 작곡, 재능을 인정받았다. 18세 때 베르디의 '아이다'를 관람한 후, 오페라 작곡을 결심한 푸치니는 23세 때 밀라노음악원에
입학, 대가의 길을 걸었다.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스승의 도움으로 첫 번째 오페라 '요정 빌리'를 작곡했으나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베르디의 작품들을 출간했던 '리코르디' 출판사와 전속작곡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큰 후원자를 얻은 것이다.
1887년(29세)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유부녀 엘비라와 사랑, 1888년 아들을 얻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면서 작곡한 두 번째 오페라 '에드가' 역시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그에게 희망을 준 작품은 1893년 발표한 '마농레스코'였다.
원작은 18세기 아베 프레보가 쓴 걸작의 애정소설이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의 작곡가 마스네가 '마농'이란 제목으로 5막짜리
오페라를 작곡해서 연주 중이었다. 그래도 이 작품을 쓰겠다고 고집하자 주위에서는 적극 만류했으나 그는 6명의 작가교체라는 드문 사례를 남기면서도
새로운 대본을 완성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3년이라는 세월을 창작에 쏟아 드디어 1893년 4막의 오페라가 탄생, 초연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평론가였던 버나드 쇼는 "푸치니는 다른 누구보다 베르디의 후계자로 적합하다.이탈리아 오페라가 부활했다"고 극찬했다.
첫 번째 성공을 안겨준 '마농레스코'는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 '팔스타프'와 오버랩되면서 푸치니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후
그는 3대 대표작인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을 연달아 발표, "베르디 이후 최고의 작곡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풍부한 선율과 애절한
내용이 돋보이는 오페라 '라보엠'은 자유롭게 살아가는 보헤미안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담았다. 3명의 예술가와 한 명의 철학가가 다락방 셋방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비련의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내용인데, 본인의 밀라노 유학시절과 그때 힘들었던 경험이 잘 표현된
작품이었다.
'토스카'는 먼저 연극으로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푸치니는 연극을 본 후 크게 감동해 이를 작곡했으며, 1900년
초연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새롭고 신기한 것에 금방 빠져드는 성격을 가졌다. 모터보트를 즐기고, 새로운 자동차와 자전거를 수집하는
등 세상의 유유유행에 민감했다. 따라서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그의 작풍은 독특한 푸치니 스타일로 회자되곤 했다. '토스카'
역시 먼 과거가 아닌 가까운 현실을 시대 배경으로 했다. 그는 연극보다 더 거칠고 극적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푸치니 반대파가 극장에 폭탄을
설치하겠다고 협박하며 반대운동을 벌여 초연에는 실패했으나, 이후 공연에서 그를 22번이나 무대에 불러들일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1901년 존경했던 베르디가 세상을 떠나고, 인후염이 악화된 상태에서 푸치니는 4년간 작곡에 전념하여 독특하고 생소한 오페라
'나비부인'을 발표한다. 이제껏 다루지 않았던 일본을 배경으로 동양의 신비로움을 표현하였는데, 작곡가 자신이 이 오페라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04년 스칼라극장에서의 초연은 역시 방해자들의 소동으로 실패했다. 낙담한 여가수에게 푸치니는 "울지 말아요. 오늘의
실패는 당신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오. 오늘밤 관객이 이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오. 오늘밤은 실패했지만, 이 오페라는 훗날 전 세계를 휩쓸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3개월 후 부분적인 수정 후에 올린 두 번째 공연이 성공하였고, 훗날 푸치니의 예언대로 전 세계가 사랑하는 오페라가
되었다. 그는 결심대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칼라극장과 결별, 그곳에 자기 오페라를 올리지 않았다.
그는 이어 바그너처럼 역사적
고전을 주제로 한 3연작의 거대한 오페라를 구상했다. 먼저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지옥을 의미한 '외투(1부)', 연옥을 의미한 '수녀
안젤리카(2부)', 그리고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아리아로 유명한 천국을 의미한 '잔니스키키(3부)'를 연달아 발표했다.
그는 이국적 소재를 좋아했다. 라보엠(프랑스), 나비부인(일본), 서부의 아가씨(미국), 마지막 작품이 된 투란도트(중국)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중국의 고전을 배경으로 한 투란도트는 음악적 스케일이 굉장히 큰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아깝게도 마지막 3부를 마치지
못하고 1924년 11월29일 66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탈리아 정부는 전국에 조기게양을 지시했으며, 거리에는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제자 프랑크 알파노는 스승이 남긴 36페이지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마지막 3부의 피날레를 마무리하여, '투란도트'를
스칼라극장에서 초연했다. 초연 날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3막 중 류가 죽음에 이르는 장면에서 조용히 지휘봉을 놓았다. 그는 청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푸치니 선생이 작곡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나비부인'의 초연 실패 후, 푸치니의 말처럼 죽을 때까지
자기 작품을 주지 않았던 스칼라였지만 '투란도트'의 초연은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이 스칼라의 대표 레퍼토리로 연주되고
있다.
푸치니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새끼손가락으로 나를 건드리며 극장을 위한
음악을 쓰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베르디나 바그너처럼 위대하지 않기 때문에 더 노력했고 지금도 더 노력한다"고. 푸치니는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의
명을 따르기 위한 특별한 은총이라 말했고, 명령에 순종했으며, 순종을 위해 늘 노력했다. 또한 베르디의 후계자로서 베르디의 증오를 넘어 그가
경멸한 바그너를 받아들였다. 이탈리아풍의 매력있는 선율로 이국적인 주제를 노래했다. 그래서 전통 위에서 새롭게 빛나는 작품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한 사랑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