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중산층의 시민들은 그들이 향유할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음악과 미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나타난 미술 사조가 평범한 삶터에서 보이는 색채를 생생하게 강조한 인상파였다. 인상파는 사물의 고유색마저 부인하고, 색채는 빛의 반사에 대한 결과라고 인식하여 보다 다양한 색채를 중시하는 후기인상주의로 발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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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조는 음악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프랑스의 드뷔시를 중심으로 독특한 화성에 의한 감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인상파음악이 태동했고 오페라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베르디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바그너로 대표되는 독일의 악극은 푸치니에 의해 새로운 종합예술로 승화됐고 주제와 소재에서 더욱 자유로운 대중문화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오페라가 대중적 인기를 얻자, 19세기 말(정확히 1890년부터 1910년까지)부터 주로 귀족이나 상류계층의 삶을 소재로 한 종래의 오페라에 반발하여 젊은 작곡가들이 노동자와 농민, 어부들의 삶을 소재로 다루는 ‘베리스모(verismo: 현실주의 또는 극사실주의)’ 오페라를 개척하였다. 이 오페라는 적나라한 삶의 현실을 전처럼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재현하여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201209010_8.gif

푸치니와 함께 밀라노음악원에서 수학한 청년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는 단 한 편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베리스모 대표자가 되었다.

1863년 이탈리아의 리보르노에서 가난한 빵집의 아들로 태어난 마스카니는 법률가를 고집했던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음악을 포기했으나, 숙부의 도움으로 밀라노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때 푸치니와 룸메이트를 하면서 오페라 작곡을 꿈꾸었으나 졸업 후 그는 3류 유랑극단과 소도시 시립악단의 지휘자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1889년 악보 출판사로 유명한 손초뇨(Sonzogno)사가 단막 오페라를 공모하였는데, 가난에 찌든 26세의 청년 마스카니는 불과 8일 만에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써내어 당당히 1등에 입상하였다. 드디어 푸치니와 레온카발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최초의 베리스모 오페라가 탄생한 것이다.

초연은 1890년 5월17일, 로마의 콘스탄치 극장에서 거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27세의 가난뱅이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 작곡가로 탈바꿈했다. 명성은 순식간에 세계로 퍼졌다. 마스카니는 베르디의 뒤를 이어서 이탈리아 가극계의 중진이 되었고, 이른바 ‘베리스모파’라 일컬어지는 반낭만적 작곡가 무리에 군림했다. 이들은 시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하는 사실주의를 표현의 특징으로 삼았다. 작품으로는 ‘나의 벗 프리츠’ ‘이리스’ ‘이자호’ ‘로드레타’ 등이 있는데, 데뷔작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작곡뿐만 아니라 지휘자로도 활약하여, 1929년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밀라노 스칼라극장 지휘자가 되어 무솔리니 독재정권 아래에서도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러나 제2차 대전 후 무솔리니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 재산을 몰수당했고, 1945년 8월 로마의 허술한 호텔 방에서 81세의 생애를 쓸쓸히 마쳤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함께 베리스모(현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으로 꼽는 것이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다. 두 작품은 작곡된 시기가 거의 같고 극의 내용도 비슷한 데다가 또 공연시간도 각기 1시간 정도의 길이여서 흔히 하룻밤의 공연 때 나란히 무대에 올려지며, 음반도 한 장에 함께께 수록하고 있다.

루지에에로 레온카발로(Ruggiero Leoncavallo, 1858~1919)는 ‘팔리아치’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무명이었다. 아버지는 나폴리의 순회재판소 판사였으며, 음악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온카발로는 어려서부터 문학과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18세에 나폴리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음악가로 두각을 나타낼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 그는 카페나 레스토랑의 피아노연주자로 일하면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집트 등지를 전전했다. 청년 시절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바그너였다. 그는 바그너를 직접 만나고 난 뒤부터 완전히 그에게 심취되어,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의 이탈리아판 격인 ‘황혼’ 3부작을 계획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문예 부흥을 소재로 한 가극이며, 매우 웅장한 규모의 작품이었다. 글재주에도 뛰어난 그는 먼저 제1부의 대본을 써서 유명한 리코르디출판사에 팔았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오페라는 3년이 지나도 공연되지 않았고, 레온카발로는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1888년 리코르디출판사의 라이벌인 손초뇨출판사가 신작 단막오페라를 공모하여, 레온카발로보다도 5살 아래인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당선되고 그가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사건은 레온카발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정도의 오페라라면 나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당장 대본을 써서 작곡을 시작했다. 불과 5개월 동안에 완성한 작품을 손초뇨로 들고 갔다. 이것이 오페라 ‘팔리아치’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손초뇨의 응모 규정은 ‘짧은 단막극’이었는데, 레온카발로 작품은 짧지만 2막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칙을 적용한다면 실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사장을 만나 이 오페라를 피아노로 연주해 들려주었다. 사장은 흔쾌히 작품을 사들였고 즉석에서 공연도 보장했다.

초연은 1892년 5월21일, 대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밀라노의 베르메극장에서 벌어졌다. 큰 성공이었다. 신문에는 “막이 내렸을 때 전에 볼 수 없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오페라계에 새 별이 떠올랐다. 몸서리쳐지는 잔인한 결말이기는 하지만 이 오페라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뒤에 남기지 않는 것은 오로지 작곡가의 뛰어난 재능 때문이다”라는 찬사가 실렸다. 이때 레온카발로의 나이는 34세였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리얼리즘 소설이라면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는 스릴러(thriller)에 가깝다. 소재가 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은 실화였고 레온카발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판결했던 충격적인 살인사건을 상기하면서 직접 대본으로 쓴 것이다. 오페라의 제목 ‘팔리아치’는 희고 덥수룩한 옷을 입은 광대를 뜻하는 ‘팔리아치오(Paliaccio)’의 복수형으로 광대패 전체를 지칭한다.

이 오페라는 토스카니니에 의해 미국과 캐나다에도 알려졌으며, 토마스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으로 시작한 레코드 초기산업에서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목소리를 녹음했다. 이 작품은 사상 최초로 100만 장 이상 팔린 음반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레온카발로도 ‘팔리아치’가 너무 강렬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가곡 ‘마티나타(아침의 세레나데)’ 외에 다른 작품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마스카니와 함께 단 한 편의 오페라로 최고의 반열에 올랐고 현대 오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