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시대에 가까워질수록 음악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베토벤 이후 다양하게 발전한 낭만파 음악은 주제에서는 자유로웠으나, 여전히
형식과 전통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창작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바그너의 개혁정신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드뷔시와 라벨에 의해 인상주의
음악으로 꽃피웠다. 이들이 선보인 생소하고 난해한 음악은 새로운 형식의 현대음악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르톡은 이를 재촉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현대음악의 시작을 누구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가 헝가리의 벨라 바르톡(Bela
Bartok, 1881년 3월25일~1945년 9월26일)이다. 이미 헝가리 출신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가 있었지만, 정작
리스트는 조국을 떠나 파리를 중심으로 당시 유행했던 음악에만 몰두했었다.
70년 뒤 같은 헝가리 태생의 바르톡은 쇤베르크 유파의
12음기법,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 등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서 가장 헝가리다우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했다.
그만큼 시대 조류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험난한 창조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들으면 고고한 아름다움에 마음마저
숙연해진다.
농업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가 7세 때 세상을 떠나고, 그는 홀어머니에 의해 자랐다. 어릴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했는데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전근할 때마다 여러 지방으로 이사를 다녔다. 그는 그때마다 그 지방에서 유행하는 민요를 배웠다. 17세 때
당시 최고의 음악학교였던 비인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헝가리 음악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음악가 도흐나니의 권유로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이듬해 헝가리 부다페스트음악원에 입학하여 리스트의 제자인 토만에게 피아노를, 브람스의 제자인 쾨슬러에게 작곡을 배웠다. 음악사에서
유명한 개혁과 보수로 대립했던 리스트와 브람스의 제자들에게서 두 사조를 배우면서 그는 그만의 독자적인 민족주의 음악관을 정립했다. 그는 리스트의
‘헝가리언 랩소디’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을 모두 비난하면서, “헝가리 음악은 집시음악이 아니다. 지금까지 발표된 음악들은 모두 가짜다”라고
과감히 선언한다. 그리고 뜻을 같이했던 작곡가 코다이와 함께 진정한 헝가리 음악을 찾아 나섰다. 당시 발명된 초기 단계의 녹음기를 들고 헝가리와
루마니아 지방을 누비며 민요와 무곡을 수집했다. 그들은 터키와 아프리카까지 범위를 넓혀서 찾아다녔다. 그들은 농촌에 매몰되었던 2,700여 곡의
헝가리민요를 비롯하여 3,500여 곡의 루마니아 민요, 200곡의 아라비아 민요 등 총 1만4천 여 곡의 민요를 악보로 남기는 초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순수한 헝가리 음악은 보다 건전하고 소박하며 힘차다고 판단, 이를 작품에 반영시켰다. ‘2개의 초상’ ‘현악기,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 등 새로운 편성에 의한 파격적인 음악을 내놓았다. 그 중 현대
피아노음악의 획을 긋는 ‘알레그로 바르바로’는 개성이 강렬하게 빛나는 야성적인 리듬의 곡으로 ‘젊은 야만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민족주의자 바르톡을 비참한 말년으로 몰았다. 친독일, 반유태인 정책을 수용한 헝가리정부에 항의하여 그는
59세이던 194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으나 지독한 자존심으로 동정과 도움을 외면, 1945년 뉴욕의 아파트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1945년 9월26일, 향년 64세였다. 그는 백혈병 진단을 받고서도 마지막 창작열을 불태웠다. 그의 대표표작이 된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비올라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모두 미국 망명시절 즉 그의 말년
작품들이다.
먼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백혈병과 극심한 가난 속에 허덕이던 그가 그처럼 밝고 흥겨운 음악을 작곡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운 곡이다. 표제가 말하듯, 독주 악기가 충분히 활약하도록 만든 화려한 곡이며, 말하자면 현대적인 ‘합주협주곡’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으며, 바르톡 입문곡으로 가장 적절하다.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는 당시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메뉴인의 청탁으로
작곡하여 뉴욕 카네기 홀에서 초연됐다.
‘비올라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은 그의 유작이었다. 바르톡의 ‘백조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비올라 협주곡’은 백혈병으로 끝내지 못한 초고에 제자 티보르 셰를리가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 1950년 초연하였다. 초연 후
독주자 프림로즈는 “이 곡에서 부족한 데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이 곡에는 모든 것, 흥분과 페이소스, 깊은 감정 그리고 적당한 민요
소재까지 깃들어있다”고 칭찬했으며, 또 초연을 지휘한 헝가리 지휘자 안탈 도라티는 “나는 이 작품을 단단함과 상쾌함과 티 없이 맑은 점이 빛나는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바르톡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희귀한
분야의 걸작이라든가 현대 음악의 기념비적인 명작이라는 평가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인 현악의 협주곡 중에서도 가장 순도 높은 음악성을 지닌 귀중한
작품으로 꼽힌다.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은 3악장의 마지막 17마디만 남아 있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제자가 이를 완성, 1946년 2월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초연했다. 곡은 부인에게 헌정되었다. 바르톡이 부인을 위해 썼다는 이 곡은 청중이 이해하기 쉽게
여성적인 감각과 간결한 화성, 조화로운 환상미가 돋보이며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곡이다.
그의 음악의 진수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6개의 현악 사중주 곡들을 추천한다. 고금의 4중주곡 중 19세기 초 베토벤이 지은 16개 곡이 최고봉이라고 한다면, 20세기 바르톡의
6개 곡은 베토벤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곡이다. 베토벤도, 바르톡도 현악4중주 작곡에 자신의 최고 역량을 집중, 예술적 집약을 시도했다.
그리고 모든 가식을 버린 궁극의 입장에서 두 작곡가는 목숨을 건 영혼의 음악을 썼다. 다소 어렵지만 바르톡의 4중주곡은 현대인의 의식을 음악을
통해 진지하게 추구했으며 결국 현대음악의 모태가 되었다.
그를 이야기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그의 아들 피터 바르톡이다.
1924년생인 그는 일찍부터 전기 음향공학을 연구했고 아버지의 작품을 레코드화할 목적으로 1949년 바르톡 협회(Bartok Society)라는
레코드회사를 창립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작품들을 직접 프로듀싱하여 음반으로 남겼다.
바르톡의 말년은 쓸쓸했고 실패한 인생으로
보였으나 사후에 음악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았다. 다소 난해하고 파격적인 음악으로 대중에게는 외면받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헝가리의 바르톡협회 회원은 현재 10만 명이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