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음악은 정말 어렵고, 난해하고, 때론 엽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필자도 현대음악을 음미하려면 단단한 각오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비인(Vienna)악파의 고전파 음악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클래식의 전형이다. 이어 낭만파로
넘어오면서 주제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수는 있었지만, 음악은 더 복잡해지고 세분화되었다. 그후 등장한 인상파 음악은 탐미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지루함마저 준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현대음악은 우리시대에 가깝지만 친숙함보다는 낯설고 생소하다. 한마디로
들어도 즐겁지 않다. 그중에서도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쇤베르크의 음악을 접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현대’라는 수식어만 봐도 아예 질려버릴 수
있다. 연주자조차 어렵다는 그의 음악은 대중적 인기가 없지만, 지금도 수많은 현대음악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쇤베르크는
작품 자체보다도 영향력이 더 중요시되는 음악가이다.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년
9월13일~1951년 7월13일)는 음렬을 사용한 12음 기법과 화성을 파괴한 무조(無調)음악을 정립한 최초의 작곡가다. 또한 베베른과 베르크
등 훌륭한 음악가들을 키워낸 교육가였고, 수많은 이론서를 저술한 이론가였다. 문학에 심취, 시와 소설을 작품에 활용했으며, 20세기 최고의
추상화가 칸딘스키, 피카소와 교류하면서 아마추어를 넘는 실력을 보인 화가이기도 했다. 취미로 자화상을 즐겨 그려 ‘쇤베르크 화집’을 따로 출간할
정도였다. 게임카드를 제작하고 4인용 체스(서양장기)를 개발하는 등 다재다능했다. 사실상 그는 기인에 가까운 천재였다.
1874년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하였다. 덕분에 그는 음악을 더욱 깊이 있게 연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후에는
이론가라고 불릴 정도의 수많은 책을 남겼다. 1897년(23세)에 현악 4중주 D장조를 작곡했으나 스스로 만족하지 않아 출판을 거부했다. 이런
연유로 1899년(25세)에 작곡한 현악 6중주 ‘정화된 밤’이 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간주된다. 이 곡은 드라마틱한 멜로디 및 각 파트가
독립적인 선율로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작곡가협회는 “화음이 비전통적”이라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다. 그러나 후에 이 곡은 대단히 인기가
높아져 나중에는 오케스트라 곡으로 편곡되어 그의 음악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 됐다.

1900년 정신분석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판하면서 “인간의 정신도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자 쇤베르크는 “음악도 감정을 분석하고 이를 음표로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1903년(29세) 드뷔시의 오페라로 유명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교향시로 작곡했는데 이 무렵 생활고 해결을 위해 개인레슨을 시작했다.
현대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로 평가되는 안톤 베베른(Anton von Webern, 1883~1945년)과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년)은 그의 제자였다. 이들은 쇤베르크의 동지이자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이들은 ‘제2 비인악파’로 불린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비인악파의 음악이 화려한 색채를 가졌다면 제2 비인악파의 음악은 잿빛 흑백 톤(tone)의 무채색을 표방한다고
하겠다.
1905년(31세) 무려 1시간에 이르는 현악 4중주 1번을 한 개의 악장으로 발표하였고, 34세에는 현악 4중주 2번을
작곡했다. 2번은 특히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성악을 3악장과 4악장에에 투입하여 현악과 가곡의 결합을 시도했다. 심지어 4악장에서는 조성이
완전히 파괴된 채 끝났다. 또한 성악가가 부르는 노래는 ‘새로운 혹성의 공기를 느낀다’로 시작한다. 이것은 그가 추구했던 새로운 음악에 대한
동경을 가사로 암시한 것이다.
1911년(37세) 800명의 연주자가 동원되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곡 ‘구레의 노래’를 작곡하였고,
이듬해 최고의 걸작 ‘달에 홀린 피에로’를 연이어 발표했다. 벨기에의 시인 길라드 (Albert Giraud, 1860~1929)가 술에
취해있는 달 밑에서 춤을 추는 피에로를 표현한 시 구절을 소재로 한 이 곡에서 쇤베르크는 ‘말하듯이 노래하듯이’를 강조, 성악가는 마치 말을
하는 것인지 노래를 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게 부른다.
1921년(47세) 발표한 12음 기법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제까지
사용해온 ‘도’에서 ‘시’까지의 기본음 7개에 사이사이의 반음을 추가해서 총 12개의 음을 균일하게 사용하는 기법으로 어떻게 하면 종래의
아름다운 화음들을 피해갈까를 고민했다. 그는 화음들을 계산적으로 완벽하게 피하는 방법을 드디어 고안할 수 있었다. 12음 기법은 음렬을 만들 때
12개의 음을 한 번씩만 사용하고 화음이 되지 않도록 이를 교묘하게 배치하는 것이다. 각 음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여러 개의 음렬들을 다시
만들어내고, 이를 거꾸로 배치하는 등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계산에 의해 완벽한 무조음을 유지했다. 이같은 12음 기법은 마음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왔다. 파격적인 기법은 그의 수제자인 베베른과 베르크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현대음악의 대표적 기법으로 정착했다.
유태인이었던 쇤베르크는 유태인 박해를 피해 1933년(59세) 미국으로 망명하여 보스턴 모르킨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다시
캘리포니아대학에서 후배지도와 창작에 정진하다가 1951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쇤베르크는 13개의 공포증이 있었다.
서양풍속대로 ‘13’이란 숫자를 꺼렸다. 그는 자기가 13일에 태어난 것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으며 76살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자릿수 두
개를 합하면 13이 되기 때문이었다. 12음 기법 창시자답게 삶 속에서도 늘 배열과 배치를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77번째
생일을 지나 정확히 두 달 후, 7월13일 세상을 떠났다.
미국 망명시절에는 이상하게도 일반이 이해할 수 있는 조성음악을
작곡했다. 유럽보다 이해수준이 낮아서였을까. 그는 말년에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1925~ ) 등 젊은 예술가들이 12음
기법을 널리 활용하자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때문에 조성음악의 발전이 늦어졌다면서 이를 반성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다시 조성음악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 대량학살 소식을 들은 그는 1947년(73세) 희생된 유태인을 추모하기 위해 12음 기법을 다시 사용하여
‘바르샤바(Warsaw)의 생존자’를 작곡했다. 이곡은 유태인수용소의 처참한 상황을 표현했으며 ‘이스라엘이여, 일어나라’와 같은 가사를 통해
생존자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주기 위해 생애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