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이데올로기 시대, 그것도 스탈린의 철권 통치하에서 늘 고뇌하면서 자신의 예술을 지키려했던 작곡가가 있었다. “서구 부르주아를 추종하는 음악인”이라는 비판과 “대표적인 사회주의 음악가”라는 상반된 찬사를 오가면서 철의 장막 안에서 괴로워했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06년 9월25일~1975년 8월9일)는 냉전이 끝난 후, 평론가들로부터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로 불릴 만큼 현대음악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20121015-4.gif

그는 구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였으나 서방으로 망명했던 프로코피예프 또는 스트라빈스키와는 달리, 사회주의 틀 속에서 19세기 음악형식을 취하면서도 현대적인 창작활동을 펼쳤다. 특히 만년에 이르러서도 작곡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 4중주곡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교향곡과 실내악곡으로 꼽힌다.

쇼스타코비치는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인 ‘피의 일요일’ 사건이 실패로 끝난 다음해인 1906년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피아노를 매우 잘 쳐서, 무성영화가 방영되는 극장에서 피아노 반주 일을 맡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반주곡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경험이 훗날 모차르트처럼 곡을 쉽게 만드는 뛰어난 능력으로 발전했다.

1917년 제2차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왕정이 붕괴되고 소비에트공화국이 탄생하면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음악협회가 설립됐다. 혁명정부는 순수예술 대신 노동자·농민들의 혁명정신을 고취하는 간단한 작곡을 요구했다.

이에 대항, 순수예술을 지양하는 현대음악협회가 나타나자 그는 이에 가입하여 작곡가의 첫 발을 내딛었다. 1926년 20세 때 교향곡 1번을 작곡하자 비평가들로부터 “교향곡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넘겼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는 1927년 발레음악 ‘황금광 시대’, 합창이 있는 단악장의 교향곡 2번 ‘10월에’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주목받았다. 특히 이 곡에는 혁명을 찬양하는 웅장한 합창을 포함했기 때문에 더욱 칭찬을 들었다. 1928년(22세)에 작곡한 풍자 오페라 ‘코’는 “러시아 현대오페라가 부활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스탈린 독재정부는 예술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작곡가 동맹’을 구성, 프롤레타리아음악협회와 현대음악협회 모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정부는 순수음악과 실험적 음악을 모두 탄압하고 ‘위대한 러시아인을 위한 음악’만을 쓰도록 강요함으로 ‘예술을 소유’하려 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정부의 탄압과 감시가 심해질 때마다 정부가 요구하는 곡을 써서 위기를 넘겼다. 1929년(23세) 혁명찬양 가사를 담은 교향곡 3번 ‘5월1일’이 이같은 곡이다.

1934년(28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작곡했는데 평론가들은 러시아 오페라의 모범으로 평가했으나 스탈린은 “곡이 어렵고, 부르주아 취향의 혼돈스런 작품”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제목을 여자 캐릭터의 이름인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Katerina Izmailova)’로 바꾸고 내용을 스탈린의 요구대로 수정, 재발표했다.

1935년(29세)에는 현악 4중주 작곡을 시작하였고, 1936년에 교향곡 4번을 작곡했으나, 오페라 ‘...맥베스 부인’으로 이미 주요 감시대상에 올랐기 때문에 리허설 도중 비밀경찰 KGB가 들이닥쳐 연습이 중단되는 사고를 겪기도 하였다.

위기를 감지한 그는 1937년(31세)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교향곡 5번 ‘혁명’을 작곡하여 스탈린의 총애를 받음으로 인생의 반전을 이루게 된다. 그는 후에 “당시 나는 도마마 위의 생선이었다”고 표현하면면서, ‘숙청 또는 강제수용소’라는 파멸의 갈림길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든 곡이며, “당국의 비판에 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이라고 항변했다.

1938년(32세) 유명한 재즈 모음곡 2번을 작곡했고, 1940년 ‘피아노 5중주’를 지어 최고의 작곡가에게 수여하는 스탈린상을 받았다. 이어 밝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교향곡 6번을, 1941년에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연이어 발표하여 두 번째 스탈린상을 받았다. 교향곡 7번의 1악장은 전체가 장대한 행진곡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군해오는 독일군을 표현한 것이라 알려졌으나, 훗날 자서전 증언에 의하면 스탈린주의의 무자비한 탄압을 비유한 것이었다.

1943년(37세) 자신의 암울했던 상황을 음악으로 묘사한 교향곡 8번을 작곡하였고, 이후 1949년까지 매해 교향곡과 실내악을 작곡해가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해 간다.

신고전주의적인 성격을 띤 ‘교향곡 제9번’이 1948년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소집한 소련 음악가 회의에서 “타락한 부르주아의 형식주의를 추종했다”는, 이른바 ‘지다노프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정책을 찬양하는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op.81’을 곧바로 발표하여 이를 무마하고 1950년 세 번째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9년(43세) 작곡한 현악 4중주 4번에서 유대음악 멜로디를 사용하여 다시 정부로부터 감시를 받은 그는 잠시 창작활동을 중단했다. 1953년(47세) 스탈린이 사망하자 사회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이 시기를 이용, 기존의 혁명찬양적 곡 대신 12음 기법, 비극적인 테마, 신고전주의적인 형식 등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작품, 즉 자기가 작곡하고 싶어하던 음악들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의 교향곡 중 가장 거대한 교향곡 10번을 작곡하였고, 다소 실험적인 작품인 현악4중주 6번을 작곡하여 정부의 의심을 받는다. 이렇게 개인취향대로 곡을 쓰다보니 정부의 비난을 다시 받았다. 그는 이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혁명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교향곡 11번 ‘1905년 (피의 일요일)’과 교향곡 12번 ‘1917’을 연이어 발표한다. 1960년(54세) 발표한 현악 4중주 8번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며’는 다섯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일 만에 작곡한 곡으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그가 지은 15개의 현악 4중주들 중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1974년(68세),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되어 버린 현악 4중주 15번까지 쉼 없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구스타프 말러도 이루지 못한 교향곡 9번의 벽을 뛰어넘어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 4중주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최후작품 4중주 15번은 마치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6개의 느린 악장으로 구성, 숨이 다하는 자기 죽음을 비장하고 처절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그의 예견처럼 이듬해 1975년 69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애제자였던 명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이야”라는 명구를 남겼다.

그의 자서전 ‘증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 교향곡들은 대부분 묘비이다. 너무 많은 국민들이 죽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 (중략) 나는 희생자들 모두에게 작품 하나씩을 바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들 모두에게 내 음악을 바친다.”

쇼스타코비치는 기존의 틀 안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한 음악가였다. 무시무시한 권력 앞에서 혁명을 찬양하기도, 혹은 슬기롭게 피하기도 했던 그를 어떤 이들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고 말하지만, 그의 사망 후 그는 공산주의의 피해자였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의 이념과 사상에 대한 논란에 앞서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술가의 자유의지를 지키려고 끝까지 노력했던 작곡가란 점이며 그가 결국 표현하려 했던 것도 체제와 이념이 아닌 ‘인간’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