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연한 가을을 좀 더 잡아두고 싶은 마음에서 단풍과 낙엽으로 표현되는 가을음악을 소개한다. 발매 60여년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애창되는 ‘Autumn Leaves(Les Feuilles Mortes)’는 늦가을 정취에 가장 잘 맞는다. 프랑스 시인 자크
플레베르(Jacque Prevert)의 시에 조셉 코스마가 곡을 붙인 이 노래는 1945년 ‘밤의 문(Les ports de la
nuit)’이란 영화에 삽입됐다. 영화는 무명가수였던 이브 몽탕(Yves Montand, 1921년 10월13일∼1991년 11월9일)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L’hymne d’amour)’와 더불어 프랑스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 때문에 자연히
캐나다의 불어권 지역으로 재빨리 넘어와 영어권 지역으로 흘러들었다.
몽탕은 1921년 10월13일 이탈리아의 밀라노 근교
몽스마노에서 유태인 빈농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보 리비(Ivo Livi)였는데, ‘몽탕(Montand)’이란 이름(‘go up’이란
뜻)은 그가 어릴 적 밖에서 놀고 있을 때 집안 창가에서 어머니가 늘 “이보! 올라와(monta)”라고 불렀던 데서 비롯됐다. 그는 2살 때
프랑스로 이주했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시대여서 유태인이었던 그의 가족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프랑스로 도망갔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마르세유의 뒷골목에 터전을 잡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혹독한 가난 속에서 심한 노동에 시달렸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노래였다. 노동하면서도 3류극장의 가수로 활동, 가수선발대회에 참가하는 등 가수의 꿈을 키웠다. 1939년 ‘이브 몽탕’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후 정식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훗날 배우로 이름을 더 날렸다.
제철소에서 중노동을 하였고, 2차대전 중에는 나치의
강제노역에 동원되다가 1944년 2월 수용소를 극적으로 탈출하는 등 파란만장한 청년기를 보냈다. 파리로 올라간 그는 그곳에서 가수로 명성을
날리다가 전설적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도움으로 영화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렇게 되자 헐리웃은 그를 주목했지만, 매카시즘(미국 도처에
공산당원이 위장활동하므로 이들을 색출, 축출해야 한다고 보는 사고방식)이 설치던 미국은 그의 공산주의 전력을 이유로 입국을
불허했다.
하지만 가수 겸 배우인 그의 인기는 프랑스에선 더욱 높아졌다. 1951년 그는 인기 여배우 시몬 시뇨레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공산당 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쯤이었다. 그는 1950년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공산당원이 된 것이다. 그의 아내 시뇨레 역시 당원이 되어 함께 거리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몽탕은 각종 정치집회에
참가해서 연설하는 등 정치적 활동을 벌이다가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크게 실망, 스탈린주의를 격렬히 비난했다.
매카시즘 열풍이
가라앉던 1960년 그는 아내가 상을 받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는 동안 마릴린 먼로와 ‘사랑합시다(Let's Make Love)’라는 영화를
찍었다. 그러나 영화 자체보다는 그와 먼로와의 염문이 세인의 관심을 더 모았다.
1960년대 그는 베트남전 반대운동을 벌였고
1968년 소련군이 체코를 침공하자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그렇지만 그리스 출신의 정치영화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 ‘계엄령’에 출연해 세계
여러 나라의 군사독재와 미국의 제3세계 정치군사적 개입을 비난하는 한편 피노체트 독재하의 칠레 민주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 산티아고를 방문해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정의를 부르짖었다. 그가 사망한 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프랑스인들의 가슴 속에 샹송가수나 명배우의 인기를
뛰어넘어 거인으로 남아있는 것은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에 대항했던 그의 신념에 찬 행보 때문이었다.
1980년대 프랑스인들은 그를
대통령 후보로 거론하기도 했으나, 그는 죽는 날까지 예술에만 전념했다. 1991년 11월8일 장 자크 베네스 감독의 영화 촬영 중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소방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도중 그를 간호하던 소방관에게 “나는 아무것도 후회할 게 없을 만큼 충분히 살았고 삶을 즐겼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예술인이었다. 다음날 파리 교외의 상리병원에서 7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전국은 애도에 빠졌다. 그가 살았던
아파트에는 조화를 든 조객들의 발길이 한없이 이어졌다. 모든 프랑스방송이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를 방송했고 미테랑 대통령도 성명을 내어
“우리시대의 위대한 목소리와 배우로서의 뛰어난 재능이 함께 사라졌다”고 애도했다. 그의 시신은 그의 인생에 큰 힘이 되어주었던 두 여인 피아프와
시뇨레가 묻힌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 라 세즈에 안장됐다.
‘Autumn Leaves’가 실린 두 장의 앨범에는 그의 청년기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1945년에서 49년 사이에 녹음된 노래들은 배우가 되기전 가수로서 인정받은 시기의 작품들로서 그의 감수성과 여운을 진하게
들려준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부른 노래 외에 유명 가수들과의 듀엣 곡들도 담았다. 서정미 넘치는 선율을 프랑스의 에스프리를 잘 살린
리듬반주로 돋보이게 했다. 특히 이 곡을 여러 버전으로 담았기 때문에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특별한 음반이다.
이 곡은
1950년 미국의 자니 머서가 영어 가사를 쓰고, 빙 크로스비가 불러 미국에서 히트하였고, 1956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져 냇 킹 콜이 부른
주제가가 큰 인기를 얻었다. 이어 1958년 블루노트 음반사에서 발매한 재즈음반 ‘Somethin' Else’에서는 캐논볼 애덜리와 마일즈
데이비스, 아트 블래키, 행크 존스, 샘 존스가 호흡을 맞춰 재즈 버전으로 연주하였다. 이 음반은 20세기 최고의 재즈음반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이 곡은 내로라하는 명가수와 명연주자들이 각양각색의 감정으로 연주, 모든 장르에서 수많은 다양한 음반으로 들을 수 있는 곡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고엽(枯葉: 마른 잎)’라고 불리며 역시 인기 레퍼토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