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둘째아들에게도 응웬신꿍이라는 아명 대신 응웬땃타인(阮必勝: 필승)이라고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호치민의 나이 열한 살 때였다.

필승. 호치민의 승리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덕분일까?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호치민, 땃타인의 눈에도 프랑스에 억압당하는 조국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땃타인은 처음엔 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아버지의 친구이자 열렬한 애국자인 부옹 선생님이 운영하는 지역학교에 입학했다.

부옹 선생님은 어린 호치민에게 조국 독립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심어줬다. 하지만 너무 짧았다. 부옹 선생님이 좀 더 적극적인 반프랑스 저항운동을 위해 학교를 문 닫고 떠나는 바람에 뜨거웠던 교육은 아쉽게 끝나고 말았다.

땃타인이 열다섯 살이던 1905년,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 프랑스어를 배우면 안 될까요?"

"아니 하필이면 프랑스어를 왜?"

"프랑스를 알아야 그들을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요?"

hochimin999.JPG기특했다. 처음엔 놀랐던 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도움을 얻어 땃타인과 형 신끼엠에게 프랑스 말과 문화를 배우게 했다. 이어 그 해 9월엔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식 예비학교에 두 형제를 입학시켰다.

자식 교육을 위해 아버지는 또 다른 결단이 필요했다. 1906년 아버지는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수도 후에로 가서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가난한 시골 선비가 최선의 모습은 아니라 스스로 위안했다. 덕분에 땃타인 형제는 후에에 있는 프랑스식 신식학교인 동바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땃 타인은 시골뜨기였다.

"넌 물고기야, 인간이야?"

친구들은 뾰족한 대나무 원뿔 모양 모자를 쓰고 다니는 땃타인을 이렇게 놀려댔다. 그러나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죽어라 공부했다. 성적이 뛰어 오르자 아무도 그를 촌놈이라 무시하지 못했다. 실력이 인격도 좌우한다는 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응웬땃타인, 중학생 호치민은 2년 과정을 1년 만에 훌쩍 건너뛰었다.


사춘기 저항의 계절


1907년 가을, 형 신끼엠과 땃타인은 국립학교인 꾸옥혹(國學) 입학시험에 나란히 합격했다. 성적이 좋아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꾸옥혹은 당시 후에(Hue) 최고의 프랑스식 교육기관이었다. 교사들은 베트남인 엘리트이거나 프랑스인이었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관리가 되었다. 입학만으로도 모두 부러워하는 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가게 됐으니 가문의 큰 영예였다.

천국의 학교. 사람들은 학교를 이렇게 불렀다.

열일곱 땃타인, 고등학생 호치민에게 본능적인 애국심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 싹은 처음엔 공부로 나타났다.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면도 있었지만 교사들이 매긴 성적표를 보면 대부분 그를 '똑똑하고 뛰어난 학생'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말과 문화, 문학, 철학 등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시골뜨기 행색을 벗지 못한 땃타인은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어이 호박 촌놈!"

황제가 사는 도시 후에의 세련된 학생들은 베트남 중부 지방 사투리가 심한 땃타인을 이렇게 불렀다. '호박'은 한심한 촌녀석이라는 뜻이었다. 땃타인은 천성이 남들과 몸으로 싸우는 걸 싫어했다. 누가 놀리든 말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가문까지 들먹이며 놀려대는 친구에게 화가 폭발했다. 어쩌다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만 상대방이 쓰러지고 말았다. 스스로 깜짝 놀랐다. 내가 사람을 때려눕히다니.


조영권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