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 타인의 풍경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뭔가를 늘 읽는데, 눈이 피로해지면 자주 눈을 슴벅인다. 그 슴벅이는 틈새에 투명한 햇살처럼 날아든 타인의 삶이 만든 정경이 잠시 가슴에 머문다. 멀리 떠있는 그 정경... 내겐 왠지 그게 풍경이었다.

세상의 추앙을 받는 칠십 노(老)시인의 인생을 막 흔들어 바꿔버린 열일곱살 소녀 ‘은교’(박범신 원작, 정지우 감독)의 영화 이야기다.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가 된 듯 돈, 권력, 학식, 명성, 모든 게 무의미한 노년의 권태에 침잠해 있을 때, 싱그러운 5월의 햇살처럼 날아든 17세 소녀와의 사랑... 파격적인 소재는 당초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다.

영화 ‘은교’가 인터넷에 올랐다. 토론토의 교민들이 이미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수익분기점이 관객 130만 명이라고 기억하는데, 아마 그쯤에서 끝나는 모양인가. 개봉을 앞두고 영화카피라이터들의 홍보는 화려했다. 이른바 예술과 대중성의 화학반응이 융합된 작품으로 포장된다. 성애장면에 목소리를 높였다. 성 노출에 대해서도 서슴치 않았다. 앙리(李安) 감독의 ‘색계’와 연계를 시키면서, 인간의 가장 은밀한 부분의 노출 신을 수식 자극한다.

뭐 이렇게 글머리를 열다보니 ‘통속’ 아니면 ‘찌질’하다는 소릴 듣기 십상이다.

노인과 소녀의 파격적인 사랑. 누구나 이내 소설 ‘로리타’(Lolita)를 떠올릴 것이다. ‘로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상기할 수도 있겠다. 중년남성이 10대 초반의 ‘로리타’와 벌이는 병적인 욕정을 그린 내용으로 대담한 성적묘사와 윤리의식의 부정으로 세계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킨 작품이다.

원작인 소설 ‘은교’는 ‘납으로 된 옷’을 입고 생의 종착을 향해 걸어가던, 세상의 추앙을 받는 노 시인의 폭풍 같은 사랑과 씁쓸한 소멸을 후일담 형식으로 회고한다. 한편 영화 ‘은교’는 노 시인과 17세 소녀 ‘은교‘와 노 시인의 젊은 제자와의 삼각 얼개를 멜로로 풀어 나간다.

복원 될 수 없는 노 시인의 젊음, 두 세계를 다 함께 가질 수 없는 ‘은교’, 훔칠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스승의 재능에 휘적거리는 젊은 제자의 한계성, 셋은 서로를 질투하고 서로를 갈망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소멸의 낭떠러지로 서서히 달음질치는... 멜로 문법의 정도를 질주한다. 영화는 아무래도 그래야하고 그래야 팔릴 테니까. 그러나 멜로의 문법은 파격적인 노출에 프리즘의 초점을 맞춘다. 가림 없는 노출신. 리얼한 섹스신.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지 알아요?... 나도 외로워서 그래요.

노 시인의 제자와 은교의 파격적인 성애장면에서 소녀의 축축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린다.

원작에는 노 시인의 나이가 77로 나온다. 책으로 묶을 때 출판사에서 주인공인 노 시인의 나이를 60대로 줄여달라는 요청이었다. 주인공이 죽어가는 노인이라면 책이 안 팔린다는 마케팅의 어려운 사유를 들면서. 작가는 기분 나빴지만, 소설은 독자의 것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타협은 이랬다. 은교와 만날 때를 69 세로, 죽을 때를 70 세로 설정한다.

농경문화의 전통사회에서는 노인은 삶의 지혜를 지닌 웃어른으로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정보화 시대의 노인은 급속한 변화의 속도에 뒤처진 잉여인간으로 폄훼되기 일쑤다.

제자가 노 시인의 ‘은교’라는 단편을 훔쳐 자기 이름으로 발표(문학동네)를 하고, 문학상(李箱)을 받게 되는 시상식에서 노시인은 모든 걸 삼키고 이런 대사를 처연한 음성으로 전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 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대학생인 딸을 가림 없는 노출연기에 내보낸 가족이 그린 그림을 본다.

시사회 기, “아버지는 ‘저를 안아주면서 좋은 작품이구나’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약간 울컥하셨는데 그냥 웃고 계셨고요”... 하지만 “이 영화는 좋은 영화라며 줄곧 그의 편편을 들어줬던 한 살 위 오빠는 영화를 안 봤다. 동생을 유난히 아끼는 오빠의 마음이 아팠을 것”이라고 전한다.

타인의 풍경, 오빠의 마음 풍경이 밀려온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