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순신 장군이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 분명한 기억은 없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이니 하는 장군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읽은 기억이 나니 이순신 장군도 아마 그때 만화로만 알았지 싶다. 대학교 4학년 때였던가,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자기네 정권체제 유지를 위해서 갑자기 구국(救國)의 영웅 이순신을 들먹였다. 박정희를, 나라를 어려움에서 건진 이순신에 비유하란 말. 아무튼 나 같은 얼간이도 그 선전의 희생물이 되어 이순신이 전란 중에 쓴 ‘난중일기’를 한 권 구해서 읽다가 20쪽을 못 넘기고 덮어버린 적이 있다.

저자에 따라 내용이 서로 다른 ‘난중일기’ 중 이번에 집어든 송찬섭님이 엮은 것을 포함하면 이번이 두 번째 정독이다. 임진왜란 7년 동안에 쓴 ‘난중일기’의 친필초고는 정조 19년 왕명으로 펴낸 ‘이충무공 전서’에 실렸다. ‘난중일기’란 책 이름도 이때 책을 편찬한 사람이 편의상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 오늘까지 그대로 내려온 것이다.

‘난중일기’는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정황뿐 아니라 인간 이순신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예로 당시 수군에는 천민이 많았다. 각종 무기를 만들고 거북선을 만들던 장인들, 이순신이 잠 못 이룰 때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어주던 부하들에 대해서도 이순신은 꼼꼼히 기록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부하가 추위에 떠는 것을 보고 자기 옷을 벗어준 이야기도 있다.

이순신은 날마다 전쟁준비, 어머님 걱정, 자식, 부하들 걱정에 잠 못 이루고 불면증·소화불량·호흡기질환으로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룰 때도 있었으나 이튿날 싸움에서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를 외치는 표범으로 변하여 앞에 서서 부하들을 독전하였다. 철저한 준비와 정확한 정보 수집으로 적의 상태를 파악하여 수십 번이 넘는 해전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명장 이순신.

(임진.15일)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져서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19일) “저녁에 광양 헌감이 진주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명부를 보내왔다.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본관이 덕수인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의 고향으로 잘못 알고 있는 아산은 이순신 어머니의 친정으로 소년 순신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순신은 풍채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순신과 같은 해에 무과에 급제한 고상안(高尙顔)은 “순신은 말과 논리와 지모가 난리를 진압할 만한 재주이나 용모가 풍만하고 두텁지 못하여 관상도 입술이 말려 올라간 듯 뒤집혀 복장(福將)은 아니라고 여겼다”고 그의 ‘태촌집’에 적었다.

이순신은 당시 영의정 서애(西涯)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다. 그러나 동인(東人)의 추천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도 그 중 한 사람. 이순신은 그의 모함으로 직함·계급을 모두 뺏기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서애의 지극한 변호로 간신히 풀려나와 백의종군을 하였다. 그것도 처음에는 수군이 아니고 육군에 배치되었다가 나중에 수군으로 옮겼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 절도사가 된 원균은 무모한 전술을 구사, 칠천량 해전을 시작으로 대패에 대패를 거듭하다가 남은 것이라고는 전선 12척뿐이었다.

왜군에 대적해 싸울 의지도 용기도 없는 조선조정은 아예 수군을 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통곡할 상황에서 이순신은 “신(臣)은 아직 살아있고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으니(微臣不死尙有十二)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허수히 보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눈물의 장계를 올린 후 330척의 적선을 명량해전에서 대파하였다. 이러한 이순신의 충의는 요새 사람들도 감동의 눈물을 떨구게 한다. 이를 생각하면 그에게 성웅(聖雄)이란 말은 10번을 해도 모자란다.

사가(史家)들은 당시 집권당이 이순신의 ‘죄’를 떠들고 죽이려 한 것은 이순신을 추천한 ‘남인’ 유성룡을 때려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전쟁에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뒤에서 밀어주기는커녕 그들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의병을 일으켜 말할 수 없이 큰 공적을 세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광주의 김덕령 장군 같은 사람들에게도 칼끝을 겨누었다. 김덕령은 서울로 압송, 고문 끝에 죽고 곽재우는 모든 것에 실망하여 영영 세상을 등지고 숨어버렸다. 그야말로 토사구팽(土死拘烹: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것으로 요긴한 때는 소중히 여기다가도 쓸모가 없게 되면 쉽게 버림을 비유하는 말)이다. 나라 일에는 관심이 없고 서로 밀고 당기는 당파싸움에만 바쁜 나날을 보내는 인간 구더기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중앙무대에서 활개를 치고 있지 않은가.

후세 사람들은 일본을 사신 자격으로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이 보고를 서로 다르게 하여 전쟁준비를 소홀히 해서 임진왜란이 더 비참한 전쟁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헛말. 조선에서는 이미 왜가 침범해올 것을 알고 그 전쟁준비의 일환으로 이순신, 이일, 신립 장군 같은 사람의 인사이동을 하지 않았던가. 무능한 선조도 나름대로 전쟁준비를 했던 것이다.

임금이 뒤에서 “이순신 장하다”고 칭찬해줬던가, 재상들이 밀어줬던가, 아니면 동료 졸개들이 박수를 쳐줬던가. 어디까지나 혼자 힘으로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은 그가 가신 후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겨레의 큰 별이 되어 영롱한 빛을 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