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 아들이 장가를 갔다. 신혼여행을 떠나보낸 후 어수선해진 집 안을 정리하다 어릴적 사진에 눈길이 머문다. 유치원
무렵의 앳된 모습이다. 구김살 없는 미소가 귀엽다. 어리지만 의젓해 보인다. 엊그제 같은데…
그 시절, 시집살이가 힘들었던 어미는
일곱살배기 아들에게 무심코 투덜거렸다. 할아버지 방에선 냄새가 나. 들어가기 싫어. 간식을 먹던 아이가 물었다. 할머니한테 그 말 했어? 응.
뒤를 치우면 창문을 한참 열어야 한다고 말했지. 팔꿈치로 엄마를 툭 치며 아이가 말했다. 에이, 말하지 말지… 제가 다 미안하단 표정이었다.
코흘리개인줄만 알았던 엄마는 얼굴이 화끈했다. 얘는 참 속이 깊구나… 엄마는 이 사실을 오래 기억했다.
양 볼이 빨개져서 신나게
뛰놀던 아이를 어느 날 덜렁 들어다가 낯선 땅, 낯선 교실에 앉혀놓았다. 힘들겠지만 잘 해내려니 하던 어느 일요일 밤. 책가방을 싸면서 아이는
소리 없는 눈물을 툭툭 떨구고 있었다. 왜 그래? 왜 우니? 말없이 훌쩍이며 침대에 눕는 아이… 엄마는 그 밤 한 숨도 못 잤다. 금요일이면
유난히 생기가 돌던 아이가 일요일 밤에 책가방을 싸며 슬퍼진 이유를 눈치 챈 것이다. 잘한 것일까? 무엇을 위해 우린 바다를 건넌 것일까? 밤새
가슴이 먹먹해지던 것이다.
아이는 이제 공부도 일등, 운동도 일등이었다. 초등학교 졸업발표회에선 연극 주연을 해 뛰어난 연기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옮겨 심은 나무가 뿌리를 내린 것 같아서 가족들은 더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연기상을 다른 아이가 탔다. 엄마는 흥분파다.
너에게 올 상이 왜 다른 데로 갔느냐고 흥분하는 엄마를 아이가 달랬다. 엄마, 데이빗네 아빠는요, 직업이 진짜 연극배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더
잘했겠지. 난 괜찮아요. 싱그럽게 웃어넘기는 모습이 늠름한 소나무 같았다.
하이틴 또래 친구들이 다 선해 보이긴 하는데, 반에서
정말 튀지 않는 애들이었다. 장난은 심한데 성적들은 별로였다. 엄마 욕심엔 너에게 도움 되는 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다. 네가 배울 게 있으면
좋겠는데…넌지시 그런 말을 했더니 의아한 눈으로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 난 친구를 그렇게 사귀지 않아요. 우린 진짜 좋은 친구들예요… 결국
아이의 말이 맞았다. 아들의 결혼식에 모여드는 친구들을 보면서 엄마는 결국 아들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무얼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었다. 불평을 한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고집을 부릴 때가 있었는데 끝까지 한글이름을 고수한 것이 그 중 하나다. 누이들도
영어이름을 가졌건만, 아들은 제 고집을 끝내 관철했다. 어린 게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났을까. 한국인은 한글이름이 당연하고, 이름으로 차별하는
기업이라면 그런덴 내가 안 가요 하던 아이였다.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이면 아이는 현관을 나서며 이렇게 부탁하곤 했다. 엄마, 오늘 오후
두시야. 잊지 말고 기도해줘요… 그럴 때면 신발끈을 묶는 그 구부린 등판에 성호를 긋곤 했었다. 아이의 그런 신심이, 그런 고집이 지금껏 아들을
키워 온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뉴욕의 월가를, 맨해튼 거리를 누비는 아들은 어디서나 돋보일 만큼 멋져보였다. 진로에 관한 모든
결정이 그랬듯이 결혼도 스스로 결정하는 게 당연하련만, 엄마는 공연히 투정이 생겼다. 푼수어미는 며느리를 예뻐하면서도 시샘을 하는 모양이다.
속내를 보이고 만다. 아들아, 너랑 결혼하면 ㅇㅇ도 멋있어지겠다? 특유의 미소로 아들이 대답했다. 엄마, 그 애는 이미 멋있어요. 아니던데?
별로 멋을 안부리던데? 아들이 갸우뚱하더니 다시 웃었다다. 아, 그런 멋이요? 알았어요. 많이 사줄게요. 하하… 푼수어미는 그제야 알아듣고
철렁했다. 응? 응… 속도 멋있고 겉도 멋지면 더 좋지. 얼버무리며 무안함을 숨겨본다.
엄마, 그 앤 이미 멋져요… 시간이 갈수록
편안해지는 말이다. 아들은 본질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낳아준 것 밖에 없는 어미에겐 늘 과분한 아이였다. 언제부턴가 아들은 새로운 손을 찾아
잡은 것이다. 아들의 마음을 몇 년씩이나 사로잡은 아가씨라면 분명 걸맞은 짝이라고 믿는다. 그래, 안심이다. 놓아주자. 실컷 날 수 있도록…그
애들은 멋지다. 엄마는 사진 속의 어린 아들을 쓰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