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나뭇잎이 선을 보이는 봄이다. 아직 귓불이 얼얼하게 찬 날씨지만 달력으로 짚어보는 계절은 틀림없는 봄이다. 며칠 동안 눈보라치고 비바람 부는 산고 끝에 마침내 대지가 봄을 낳았나 보다. 귀하게 태어난 봄을 마중하러 길을 나섰다.
사람이 정초에 새로운 계획으로 또 하나의 삶을 열듯 나무도 새싹을 밀어 올려 나무 삶의 한 해를 시작하느라 다들 상기된 표정이었다. 키만 멀쑥하게 클 뿐 아직 어린 잎들을 매단 나무들이 눅진한 냄새를 뿜어내었다. 산길에는 누런 솔잎과 낙엽이 그대로 쌓여있어 마치 늦가을 산 같았다. 손님 맞을 채비를 하려는지, 숲은 나무 발치에 안개를 깔아놓고 있었다. 비탈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길이 좁아지며 두 갈래로 갈라졌다. 잠시 망설인 끝에 나무가 많은 길을 택했다. 엷은 안개가 차츰 퍼지며 숲의 풍경을 살짝 가려주자, 조금은 불안하던 숲의 정적이 비로소 아늑하게 느껴졌다. 적당히 오래되고 적당히 낡은 것에서 느껴지던 그런 친숙함이었다.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해도 나는 그 속에서 평화롭고 편안했다.
벌써 봄을 타는지 몸이 나른해서 마른 풀이 있는 곳에 그림자를 포개어 앉았다. 철 이른 제비꽃 하나가 억새 발부리에서 보라색 향기를 길어 올릴 태세였다. 생명을 받을 때부터 이미 현생에서의 제 할 일을 알고 태어나기나 한 듯, 숲 속 생명들은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 없고 애써 배우지 않아도 다들 제 역할에 충실해 보였다.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경이로움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매일 일어나는 기적도 놓치며 살아왔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로운 눈으로 작은 기적을 발견하는 삶과, 무심코 지나치는 삶의 질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자연이 지닌 커다란 힘과 오묘한 이치는 인간이 그 섭리에 순응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가파른 산길 아래쪽, 안개를 걷어 올린 강물이 햇빛을 되받아치며 물비늘을 일으켰다. 강폭이 넓어지는 곳에 자갈 쌓인 둔덕이 있었다. 작년 가을, 모성으로 응집된 삶을 처절하게 흩뿌리며 역류하던 어미 송어들을 이곳에서 만났다. 지금쯤 몸을 풀고 다들 제 돌아갈 곳으로 갔을 것이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존재로 떠났기에 이승에 대한 미련은 없었을까. 제 태어난 곳에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알을 낳은 어미로서, 번식의 책임을 다했으니 만족해서 삶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아직 온기를 품지 못한 쌀쌀한 바람이 품을 파고들자 따끈한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정상에 오르니 억새밭에 쏟아지는 햇빛으로 속눈썹에 먼지가 앉은 것처럼 빛이 여러 각도로 퍼지며 세상이 온통 무지갯빛으로 보였다. 은빛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비벼 서걱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심리적으로는 아직 가을을 버리지 못한 억새들인지 볕에 잘 익은 가을 냄새가 아직도 묻어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 정수리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가 천천히 내뱉는 일을 반복하며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냄새를 차례로 맛보았다. 관목 사이로 푸드득, 조막만한 새 한 마리가 날아가 앉자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나뭇가지가 휘청거렸다. 등과 날개에 검은 무늬가 있는 하얀 새였다. 작지만 높은 톤으로 노래를 하자 어디선가 화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터질 듯 부푼 파란 하늘에서 구름 몇 조각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숲에는 평화로운 봄이 어느새 그렇게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