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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들의 징검다리가 끝나는 곳에 키웨스트(Key West)가 있다. 마이애미 남쪽으로 200km 달려가면 미국 동부 대륙의 땅 끝이다. 거기서 물길로 150km 더 내려가면 쿠바가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섬들은 바다와 높이를 다투지 않는다.

키웨스트의 해발고도는 고작 6m. 웬만한 2층 건물의 높이에도 미치지 않는다. 헤밍웨이는 키웨스트의 해발고도를 아프리카에서 제일 높다는 킬리만자로 산 높이로 올려놓았다. 산기슭에서 썩은 고기를 탐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표범은 헤밍웨이가 쓴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온다.

young_hemingway_in_house.jpg그가 살던 헤밍웨이 하우스는 미국 국가사적지가 됐고, 그가 쌓아 올린 문학의 탑은 지구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높이가 됐다. 그의 집 베란다에서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빨간 색의 등대다. 주로 아침 일찍 글을 쓰던 그는 어스름엔 바를 찾고 술에 취했다. 집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등대 때문이었다.

그는 술집 주인만 친구로 삼은 게 아니었다. 어부, 선장, 해안경비원. 부두인부들과 어울렸고 그들의 얘기를 유심히 들었다. 노벨상 수상작인 ‘바다와 노인’은 그런 노력 끝에 탄생했다. 그가 사람 말고 또 친구로 삼은 건 고양이들이다. 현재 헤밍웨이 하우스에는 44마리의 고양이들이 우글거린다. 헤밍웨이가 거주할 때는 60 내지 70마리의 고양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해설원은 헤밍웨이가 미신적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전쟁터에서 박격포탄이 터져 살 속에 파편들이 200개 이상 박혔다. 어느 날 4살짜리 아들이 그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될 뻔했다. 쿠바에서 타고 가던 자동차가 나무와 부딪쳐 갈비뼈 4개가 부러졌다. 아프리카에서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그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 사고에서 뇌진탕이 일어났고 신장과 비장, 척추에 손상을 입었다.

고양이를 귀히 여기면 그런 재앙들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단 얘기인가. 해설원들은 때로 추측성 발언을 내뱉기 일쑤다. 그래서 전설이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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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네 부인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첫째, 두 번째, 네 번째, 세 번째 부인.
고양이 숫자와는 비할 바 아니지만 헤밍웨이는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다. 정식 결혼한 여자가 넷이었고 마음을 빼앗긴 여자도 여럿 있었다. 1948년 그는 네 번째 부인 메리 웰시와 베니스에 몇 달 머물렀다. 그때 자기보다 30년 연하인 19세의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 플라토닉 러브라고도 전한다.

헤밍웨이가 키웨스트에 살게 된 건 세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 때문이다. 그녀의 숙부가 재산가였는데 그들 부부에게 별채가 달린 저택을 선물했다. 이 저택은 거대한 2층으로 돼 있고 1851년 건축된 스페인 식민지 풍의 건물이다. 본채 2층의 응접실 벽에는 헤밍웨이 사진이 네 부인들의 사진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다.

첫째 부인 해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한 것은 헤밍웨이가 22살 때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8살 연상이었다. 나이가 무슨 문제냐고 큰소리치던 헤밍웨이는 5년쯤 지났을 때 나중 둘째 부인이 된 폴린 파이퍼와 은밀한 사이가 된다. 의연한 해들리는 두 사람이 6개월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것을 주문했다. 그때도 도저히 사랑을 참을 수 없다면 이혼을 해 주겠다고 선심을 쓴다.

헤밍웨이는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내가 그녀 말고 다른 여자들을 사랑하기 전에 죽었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썼다. 해들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녀가 가정주부형이었다면 다른 세 부인들은 모두 기자 출신들이었다. 폴린 파이퍼와 셋째 부인 마르타 겔혼은 파리에서 보그(Vogue) 잡지 기자로 일했고 넷째 부인 메리 웰시는 타임지 기자였을 때 런던에서 헤밍웨이와 가까워졌다.

그는 혼신을 다해 작품을 썼다. 작품을 쓸 때는 부부생활도 중단했다. 그 때문은 아니지만 대작이 완성될 때마다 부인이 달랐다. 첫 장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가 완성된 것은 1926년 파리에서였는데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 함께 살던 때였다. 1929년 두 번째 아내 폴린 파이퍼와 살 때 ‘무기여 잘있거라’를 내놨다. 그로 인해 그는 미국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 됐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가 출간된 것은 1940년 세 번째 부인 마르타 겔혼과 살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불멸의 명작 ‘바다와 노인’은 네 번째 부인 메리 웰시와 결혼한 뒤인 1951년에 완성됐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달리 말한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끝날 때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건 불운이었다”고. 유럽의 전쟁에 뛰어든 것은 그가 20살 때였고 그 이후 네 사람의 부인들과 만나고 헤어진 것은 그 전쟁터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전쟁터로 뛰어 갔다. 유약한 책상물림의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겠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추구했던 스페인의 투우장이나 아프리카의 사파리, 그리고 쿠바의 바다낚시도 그런 소신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동행을 필요로 하는 유약한 심성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