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잠든

한 밤 중

뒤척이는 적막이 하도 수상쩍어

무심결에 눈이 떠졌습니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니

달이 없어야 할,

그믐밤이

대낮같이 환했습니다.



솜뭉치만한 눈송이들이

나뭇가지들을 휘어지게 만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그 위에 또 내리고

또 내리면서 쌓이고 있었습니다.



이 한 밤

백설이 선약(仙藥)이 되어

이 세상을 얼룩지우고 있는

온갖 죄악과 슬픔까지도

시린 눈꽃처럼 하얗게

빛나게 할 수는 없을까 싶었습니다.



온 세상천지가

흰 마 음

맑은 사랑 빛으로 변하여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이를

위로하고, 달래어주는 배경색으로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으면 싶었습니다.



오랜 전에 발표했던 자작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 토론토에 겨울이 되면 지금보다 눈이 많이 내렸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인도에 걸어가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치워 올린 눈의 높이가 작은 언덕을 이루었고, 겨울의 길이도 아마 지금보다는 두어 달 정도 더 길었던 것 같다.

한겨울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같이 가게 문을 닫고 늦은 시간에 돌아와 곤히 잠에 들었다는데, 너무도 고요하고 이상할 정도로 적막한 분위기에 눌려 잠결에 눈을 떠보니 창밖이 대낮같이 환하지 않는가.

분명 그믐밤이라야 하는데 이웃집에 불이라도 났나 싶어 놀란 마음에 창가로 급히 다가가 밖을 내다보니 솜뭉치 같은 함박눈이 한없이 내리고 있지 않는가. 당시 살던 우리 집은 앞뒤 뜰이 꽤나 넓고 오래된 큰 나무들이 많았던 관계로, 잠결에 일어나 보는 눈 내리는 광경에 정말 일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난 가을에도 낙엽을 밟으며 먼 길 한번 떠나보고 싶더니, 요즘도 잠든 사이에 소리 없이 내린 은백(銀白)의 천지를 보면 아무도 밟지 않은 저 눈밭을 걸어 어디론가 오래오래 걷고 싶은 아이 같은 마음이 될 때가 많다.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은 아마 나이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나보다. 오늘 밤에는 철없이 즐겁기만 했던 내 유년시절의 어린 아이 때와 같은 꿈을 꾸면서 환상적인 하늘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마르크 샤갈(1887~1985)의 그림 속에 사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창공을 날아다니는 신나는 하늘여행을 한번 떠나보고 싶다. 발로 차면 가볍게 하늘로 솟아오르고 힘이 빠져 땅으로 내려앉으려는 순간 양팔을 벌려 조금만 힘주어 날갯짓해도 다시 하늘 높이 되 솟아올라 훨훨 날아다니는 신나는 ‘하늘나라 여행 꿈’을 오늘밤 밤새도록 꾸어 보고 싶다.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황홀한 색채로 어우러진 사갈의 그림속의 주인공이 되어 나의 어릴 적 친구들 그리운 얼굴들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