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갈 때면
하얗게 세어 죽어가면서 피어나는 꽃.
화왕산 억새풀 생각이 난다.
하얀 소복 입은
기막힌 삶의 아픔을 숨기고,
마른 억새끼리 서로 부딪히면서 내는
그 애잔한 울음소리의 물결.
가야(伽倻)인 들의 음성과
홍의장군 곽재우 휘하 의병들의
함성소리가 함께 들리는 곳.
화왕산성 광활한 분지 안에서
꿋꿋한 민중의 혼으로 되살아난
억새풀 군락이 그리워진다.
고향 그리워하는 마음도
세월이 가면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까마득히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회귀본능의 구심력으로
큰 원형을 그리면서 출발점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망향(望鄕)의 본능 앞에 눈물겹다.
내 마음의 근원이며 원점인 그곳 고향. 과거는 분명 우리가 가 닿아야 할 미래인가 보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걸어 온 먼 길이 휘어져 다시 내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내가 처음 출발한 그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달려왔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나는 이미 처음 출발한 그곳으로 큰 원형을 그리면서 가까이 가 있었다. 내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 매산(梅山)이다. 내가 아호(雅號)로 사용하는 매산은 곧 내 고향마을의 이름이다. 마을 앞으로 넓은 시냇물이 흐르고, ‘어물리’라는 이름의 넓은 들판 저 너머로 화왕산(757m) 상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내 고향 마을은 이른 봄부터 매화꽃이 만발하는 정 많은 농촌마을이다.
오랜 세월 전에 조국을 떠나 이곳으로 이민을 왔을 때와 지금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깊이가 사뭇 달라졌다. 그때는 마냥 그립기만 했는데, 지금은 뼛속 깊이 사무치면서 그리워진다.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그냥 서럽고, 더 깊이 생각하면 가슴 아려오는 그곳.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마음은 이미 저녁 짓는 연기가 뒷동산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로 어우러지는 그곳. 고향마을로 돌아가 있다.
분명 고향이란 마지막 마음이 머무는 곳인가 보다. 내 고향 창녕은 지금 한창 관광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제2의 경주라 불릴 정도로 가야,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아우러진 고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왕산과 부곡온천, 최근에는 우포늪이 람사르총회 공식방문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 송현동 가야시대 고분군. 신라시대의 석탑들과 석빙고.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친 성곽 화왕산성. 의상 대사가 창건한 관룡사 등 귀중한 사적들을 많이 품어 안은 고장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150기가 넘는 송현동 가야시대 고분군을 주목할 만하다. 일본 강점기에 고분군의 부장품들을 얼마나 많이 도굴해 일본으로 가져갔는지 도굴품을 실은 수레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왕산성과 신라의 고찰 관용사를 품어 안은 국립공원 화왕산은, 화산 폭발로 형성된 산으로서 6만 평이 넘는 광대한 분화구로 형성된 평원에 늦가을이 되면 억새풀 군락이 장관을 이루는데, 이때가 되면 전국에서 모여든 2만여 명의 산악인들이 조국통일과 풍년을 기원하는 ‘억새제’와 억새 태우기 행사가 한밤중에 산 정상에서 장관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