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목회시절(44)


용정 여행을 마치고 밤늦게 연길로 돌아왔다. 우리 일행은 등산가들은 아니었지만 백두산은 꼭 보고 간다는 계획이었다. 아침 일찍 연길을 떠났다. 날씨가 흐려서 비가 내릴 예감이었다. 우리의 장백산(그곳 사람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여행을 격려해 주는 분들이 날씨 때문에 산에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마이크로 버스에 타고 연길을 떠나는데 우리 여행가이드는 여러 번 백두산 등산 안내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서 길가의 동네들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해 주곤 했다. 가는 길에 명월구, 화룡현 시골동네 등을 거쳐 멀리를 흘러 내려오는 작은 강물들을 지나서 드디어 백두산 밑에 이르렀다. 마침내 흐렸던 날씨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로 변했다. 안내자는 “먼 나라에서 온 일행이고 또 일행의 어른이 흰 수염의 백두산 도사님이어서 하늘도 천지도 활짝 열린 얼굴로 환영하는 것”이라고 농담을 해서 모두가 함께 웃고 ‘백두산 도사’라는 싫지 않은 존칭을 선물로 받았다.

지프차에 갈아타고 일행은 드디어 호숫가에 다다랐다.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공기로 숨이 탁탁 막힌다.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화산암으로 된 절벽 위에 섰다. 그림에서 보던 그대로다. 화산이 터져 산봉우리가 송두리째 날아간 웅덩이에 하늘보다도 푸른 연못이 고여 있다.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신비하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천지 연못의 건너편까지 분명히 보인다. 이 호수의 3분의 2는 북한 영토에 속한다고 한다. 금단의 땅 같은 조국 강토의 북쪽 절반의 일부가 우리들의 눈앞에 보인다. 기념사진도 여러 장 찍고 산을 내려와 호텔에 들었다. 온천물을 끌어들여 시설한 목욕탕에서 몸을 풀고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밑에 올라가서 얼음같이 찬 폭포물에 발을 담가보기도 했다.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 안도라는 곳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이 곳은 본래 명월구라고 불리던 곳이다. 여기에 일본 군벌이 한국 독립군 토벌의 선봉대로 쓰느라고 창설한 조선인 특설부대가 있었다. 산 속에 본거지를 두고 투쟁해온 독립군들이 일본 군대를 유도작전으로 산에 끌어들여 번번이 전멸시키다시피 하니 일본 군부는 조선인 특설부대를 선봉에 세워 독립군과 싸우게 하고 자기들은 그 뒤에 서서 독전부대가 되는 조직을 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사람끼리 서로 총질을 하게 하니 조선인 독립군들은 큰소리로 조선인 특설부대를 향해 “너희들에게는 조선사람의 혼이 없느냐? 총부리를 돌려대고 일본인 독전부대를 쏴라!”하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밤늦게 연길에 돌아와서 호텔에서 쉬었는데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은 캐나다로 귀국하는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연길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아침에 장춘에 도착했다. 북경행 비행기를 타려고 비행장에 가서 탑승 수속을 하려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항공권은 중국 민항에서 구입한 것이 아니고 토론토에 있는 캐나다 민항에서 구입한 것이라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항공권은 어느 나라에서 구입했든 세계적으로 통용된다는 우리의 생각은 중국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일행은 다시 항공권을 사야 했다. 모두들 주머니에 돈이 남아있지 않다는 형편이어서 난감해 했다. 나는 속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던 비상금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 비상금은 사실은 혹시 내 가족을 만나면 주고 오려고 간직해 둔 것이었는데 가족을 못 만나서 동행들을 구하는 돈으로 쓰게 되었다.

북경에서의 마지막 날도 한가하지 않았다. 몇 사람의 고위 관리들, 조선족 지도자들도 만나서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과 캐나다에 사는 동포사회의 교류 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을 했다. 홍콩을 거쳐 토론토에 돌아왔을 때는 너무도 피곤했다. 가족을 만나지 못하여 가슴이 쓰쓰리기는 했으나 젊은 시절의 삶을 도로 찾은 수확은 분명히 있었다.

(필자 주: 이번 여행의 기행문은 동행했던 김광웅 선생과의 공동작품임을 독자들께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