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목회시절(43)
용정에는 변하지 않은 상징 같은 해란강이 여전히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 위에는 ‘용문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옛날 다리는 없어지고 새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해란강 다리에 서서 두루 살피는 동안 옛날에 부르던 노래들이 내 입술에서 흘러 나왔다.
‘해란강에 비가 올 때 맺은 사랑은 해란강에 눈이 오니 그만이던가!’
또 해란강 다리에서 바라보이는 ‘일송정’을 바라보니 ‘선구자’라는 유명한 노래도 마음에 떠올랐다. 나는 1940년대 용정 은진중학교 재학중 기독학생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주일마다 이 용문교를 걸어 건너서 동흥중학교 옆을 지나 ‘용강동’이라는 동네에 있는 개척교회에 가서 주일학교도 인도하고 자주 어른들에게 설교한 일도 있었다. 나는 종종 그때 일을 상기하면서 ‘내가 도대체 무슨 설교를 했을까?’하고 자문하고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우리 일행은 당시 용정 현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날 일본인들이 건설하여 일본총영사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으로 안내됐다. 이 건물은 크고 또 그 울타리도 넓은 면적의 땅을 둘러싸고 있어 웅장했다. 지하실에는 견고한 감옥이 마련돼 있었다.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대부분이 감금되어 피를 흘리며 고문을 당하던 곳이었다. 그날 그 건물 안에서 용정 조선족 유지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문화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이 감옥에서 수많은 조선족 지도자들이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했다”고 속삭여 주었다. 그 건물의 울타리를 끼고 은진중학교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동성상점’이라는 잡화상이 있었는데 그 가게에서 기독교서적을 팔고 있어 고학생이었던 내가 주머니를 털어 책을 사던 일이 생각났다. 동성상점에서 명신여학교 쪽 언덕 위에 ‘동산장로교회’라는 교회가 있었고 바로 그 옆에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가 건설한 ‘제창병원’이라는 좋은 병원이 있었는데 명신여학교도, 동산장로교회도, 제창병원도 다 없어지고 폐허 위에 벽돌조각들만이 뒹굴고 있어 마음이 몹시 아팠다. 연길과 용정 두 곳에서는 조선족 기독교회가 소수의 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있었으나 우리 일행가 그들의 주일예배에 동참할 기회는 없었다.
용정에는 문재린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중앙장로교회, 이권찬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동산장로교회, 송득후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감리교회, 조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성결교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성결교회만이 남아있는 형편이었다. 교회에 미리 연락해서 평일에 방문했다. 10여 명의 교인들을 만났다. 교인 중 이남규 장로(용강동 출신)를 만나 너무도 반가워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용정교회들은 나를 기독교인으로 키워준 어머니같은 신앙공동체인데 그 교회들의 폐허 앞에 서니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좋으신 신앙의 선배들 강원용 목사,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김영규 장로 등도 용정서 만나 평생을 교류하면서 지내고 있다. 용정 제창병원에 재직 중이던 블랙(Black)의사에게서 치료받은 일도 있었는데 내가 밴쿠버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한 뒤 참가한 첫 주말 학생연수회에서 신입생 중의 한 사람이었던 블랙 의사의 아들을 만나기도 했으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미묘한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좀 더 신비한 얘기도 있다.
내가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1년 전에 서울로 가신 김재준 선생님이 은진중학교의 교목으로 계셨고 그 분의 지도 하에서 강원용 박사, 안병무 박사 등이 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해왔다는 얘기를 듣고 뵙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했었는데 서울에 와서 조선신학교에 입학해 그 분의 제자가 되고 또 해방직후 그 분이 주일설교를 맡고 계시던 경동장로교회의 교인이 되고, 늘 테두리 안에서 인연을 가지고 사귀며 같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함께 하던 김재준 목사님의 둘째딸인 김신자님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신비하다고 생각하며 지금도 뜨거운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