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이 23일(일) 국회광장에서 거행된다. 한국현대사의 거목이 한국민의 곁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토론토 한인사회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만큼 이곳 한인들의 상실감은 깊고 클 것이다. 평생을 한국 민주화와 대북화해를 위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국현대사에서 김 전 대통령만큼 큰 족적을 남긴 인물도 드물다. 상고졸업 학력으로 국회의원에 6번 당선됐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뤘고 사상초유의 외환위기를 단기에 극복하는 업적을 남겼다. 대통령 재임시절에는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그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진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군사정권시절에는 무려 55차례나 가택연금을 당했고 두 번에 걸쳐 6년간 옥고를 치렀다. 바다에서 수장(水葬)당할 뻔 했고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아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는 이런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앞당겼다. 그의 불굴의 투지와 집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귀감이다. 고인은 또 무엇이든 철저히 준비하는 치밀한 스타일이었다. 항상 책을 읽고 공부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수첩을 꺼내들고 적었다.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했던 것도 이런 노력 덕이다.

김 전 대통령에게 찬사만 있는 게 아니다. 고국은 물론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개인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서슬 퍼런 독재정권시절 그가 온몸을 던져 항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인은 지역주의의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또한 수혜자였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 하다. 이 문제는 고인을 떠나보내며 한국인 모두가 고민하며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대북정책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분야다. 남북정상회담과 경제교류 및 금강산관광 등을 통해 남북 간 화해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큰 업적이다. 개성공단에서 4만여 명의 북한주민이 한국기업에서 근무하는 것도 김 전 대통령 집권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햇볕정책은 고인의 의도와는 달리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뿐 아니라 오히려 김정일정권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이에 대한 논란은 후일 역사의 검증을 받을 것이지만 그의 대북 포용정책이 평화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고인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북미한인사회와의 인연이다. 그는 82년부터 3년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통해 많은 한인들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84년 토론토의 한국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가 주최한 DJ 초청 버펄로대 강연에 1천여 명의 캐나다한인들이 참석한 것이 일례다. 고인은 92년 LA폭동이 발생하자 한국 정치인 중에서 가장 먼저 미국에 와 피해상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해외한인에 대한 관심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어졌다. 취임사를 통해 해외동포의 권익보호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다짐했고 이듬해 재외동포특례법을 입법화함으로써 약속을 지켰다. 해외한인들에게 한국 내에서의 법적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는 특례법은 이후 참정권 부여의 원동력이 됐다.

모국과 마찬가지로 캐나다한인사회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차이로 적지 않은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그룹과 무조건 반대하는 그룹은 서로 얘기를 하다가도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느 그룹에 속했든 그를 보내면서 그가 남긴 유산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북교류는 근본적으로 화해에서 출발한다. 반목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포용의 정신이다.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화해의 발자취는 한국의 발전과 통일의 씨앗이 되고 해외한인사회도 화합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