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의 지름길은 개방정책을 통한 수출산업 육성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돼 있다. 수출산업 육성을 통해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의 예를 들면 흔히 ‘아시아의 호랑이Asian Tigers’라고 불리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이 있고, 최근 급부상한 중국과 인도(Chindia)가 있다. 이들은 모두 매년 커다란 무역수지 흑자를 누적시켜 막대한 양의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다. 이들 나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수출 덕에 엄청나게 향상됐다. 수출이 생활수준 향상의 직접적 원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수출은 간접적 원인 일뿐 직접적 원인은 수입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의 현재 생활수준이 30년 전에 비해 크게 향상된 이유는 한국이 자동차, 선박, 반도체 등을 많이 수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로 온갖 상품과 서비스를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소비했기 때문이다. 수출은 생활수준 향상의 직접적 원인인 수입을 가능하게 하는 간접적 원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무역수지 흑자를 매년 되풀이한다면 이 흑자부분은 생활수준 향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보유고는 늘어나겠지만 쓰지 않고 쌓아두는 돈은 당장 그 나라 국민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활수준 유지 및 향상을 위해 피땀 흘려 온갖 상품을 생산해 수출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물론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쌓아놓고 있으니 부자가 된 느낌이 들겠지만 이 돈을 수입을 위해 쓰기 전에는 또는 해외 생산시설에 투자하기 전에는 종이쪽지(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위험이 따르는 외화표시채권)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면 수출은 저축과 같고 수입은 소비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생활수준을 높여주는 것은 저축이 아니고 소비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저축은 더 많은 미래의 소비를 가능케 하지만 저축 자체가 생활수준을 높여주지 않는다. 지금 당장의 소비가 됐든 미래의 소비가 됐든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저축이 아니고 소비다. 평생 일만 죽어라하고(어떤 경우에는 건강까지 해치면서) 저축만 하다가 쓰지 못하고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피땀 흘려 생산한 상품을 수출해 외화만 쌓아놓고 수입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중국이나 일본처럼 외환보유액이 국민소득의 31%와 27%가 넘도록 쌓아놓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외국사람들이 싼값에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값싼 옷을 입고 다닐 수 있도록 피땀 흘려 노동만 한 결과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쌓아놓은 외환보유고를 털어서 수입을 늘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다. 그러나 반드시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위기 시 환율방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외환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통화가 국제무역 및 국제자본시장에서 기축통화로 쓰이기 때문에 많은 양의 외화를 갖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미국도 다른 나라 통화 대비 자국통화의 환율을 조절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자국 통화량을 조절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 통화량 조절은 자국 거시경제정책(경기 안정화정책)의 틀 안에서 필요에 따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미국은 환율조절을 위해 통화량을 조절하지 않는다. 다른 선진국들도 대부분 비슷하다. 통화정책을 그저 환율조절에 희생시키기에는 아깝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필요 이상의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지 않는 이유다. 대신 그들은 환율의 움직임을 시장에 맡기는 정책을 쓴다.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쓰는 것이다. 캐나다가 좋은 예다. 캐나다의 외환보유고는 국민소득의 3.6%에 불과한 590억불 정도다. 환율방어의 중요성보다는 자국 경제 안정에 필요한 적절한 통화정책의 중요성에 더 큰 무게를 둔다.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더 중요시한다는 증거다. 그러나 막대한 외환을 갖고 있는 중국, 일본, 한국 같은 나라들은 환율 방어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정책이 반드시 현명한 정책이라고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필요 이상의 외환보유고는 그만큼 생활수준 향상의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얼마만큼의 외환보유고가 그 나라 경제에 가장 적합한 수준일까? 그것은 그 나라 국내 경제의 안정 성장을 위해 환율변동의 위협에 제약을 받지 않고 얼마만큼 자유스럽게 국내 통화정책을 수행할 의지가 있느냐에 달려있다. 환율방어에 급급해 통화정책을 희생시키고 싶으면 외환보유액을 늘려야 하고, 환율의 움직임에 크게 개의치 않고 올바른 국내 통화정책을 추구할 의지가 확고하다면 막대한 양의 외환보유액을 유지할 필요성을 덜 느끼는 것이다. 필요 이상의 외환보유액을 유지하는 대신 국민 생활수준 향상에 도움 되는 정책을 쓰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위기 시 환율방어에 필요한 외환보유액은 3년 만기 이내 단기외채 잔액인 1,350억불 정도이면 충분할 것이다. 국민소득의 21.7%에 해당하는 2,930억불의 현 외환보유고는 북한 위험요소를 감안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외환보유고를 유지하는 것보다 생산성 향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투기성 단기외채의 유입을 통제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정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금년 중순쯤 시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비예금성 은행 외채에 부과되는 은행세는 이러한 정책에 부합되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세금이 장기외채에도 부과된다는 사실은, 단기외채에 보다 낮은 세율을 적용한다 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