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봄날 새벽 정적을 깨며 휴대폰이 울렸다. 알람이 울리려면 아직 30분은 있어야 되는데 누굴까? 불길한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유 선생님? 저 김과장입니다. 이른 새벽에 전화 드려 죄송한데요,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밤 신차장님이 야근하다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는데, 그만 병원으로 옮기던 중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신차장은 군대 후배 소개로 고객이 된 김과장과는 같은 회사의 상사로 근무하던 분이었다. 김과장한테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날 원래 큰 목소리가 그날은 더 컸던지 내게 다가와 어떤 보험이냐며 관심을 보여 가정방문 약속을 했던 고객이었다. 최근 아파트를 구입하고 셋째 아이 계획이 있었기에 가장으로서 꿈과 희망,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손쉬운 청약이 될 거라 나는 예상을 했었다.

그런데 가정방문한 날 그 예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비스듬히 돌아앉은 부인은 남편에게 보험료 낼 돈 있으면 은행에 저축을 더 하든지, 아이들 학원 한 곳이라도 더 보내게 생활비를 더 줘요라고 언성을 높이며 사정없이 남편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신차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나 쉽지 않아 보였다. 부인과 두 딸을 위한 보험금으로 3억을 계약하려 했으나 1억 원의 청약서에 서명을 받고는 쫓기듯 아파트를 나서야 했다.

그날 저녁 강남병원 영안실, 보험회사에서 온 걸 어찌 알았는지 친지들이 여러 질문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큰형이라는 분은 보험금은 얼마냐? 언제, 누가 수익자로 되어 있냐? 하며 집요하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교육 받은 대로 수익자 본인 이외에는 말씀드릴 수 없다고 하자 나의 멱살을 잡으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간신히 문상을 마친 나는 어린 딸 셋을 남기고 세상을 등진 남편의 영정을 붙들고 실신할 정도로 오열하는 미망인과의 대화는 다음날로 미룬 채 자리를 뜨려는 순간 옷깃을 붙잡는 느낌이 있어 뒤를 돌아보니 좀 전까지 오열하던 고인의 부인이었다. 흐트러진 머리 사이로 눈물 가득한 눈동자는 슬픔과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부인은 간신히 말을 꺼내며 내게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보험 효력여부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자 조금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사망 며칠 전 우린 보험 같은 거 필요 없으니 당장 해약하라고 했거든요. 용돈도 넉넉히 주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걸 유지했는지

두 번째 질문은 수익자가 누구로 되어 있냐 해서 부인 앞으로 되어 있다는 말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보험금은 얼마냐고 물었다. 3억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면서 “1억 아닌가요? 어떻게 3억이

쫓기듯 청약을 마치고 나온 얼마 후 회사로 고인을 찾아간 나는 1억을 증액했고 셋째가 태어난 후 또 1억을 증액해 보험금은 3억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부인의 눈 속에서 안도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인은 점점 안정을 찾아가며 남동생을 부르더니 앞으로 보험금에 관한 모든 일은 제 남동생하고만 상의해주세요. 시아주버님이 부도가 났는데 글쎄 동생 보험금을 탐하지 뭐에요.” 이것이 고인의 형님이 나의 멱살까지 잡으며 흥분했던 이유였다.

며칠 후 보험금 지급증서를 가지고 다시 부인을 방문했다. 마침 그날은 삼오제를 지내 부인은 상복차림이었다. 아빠의 죽음을 모르는 둘째와 막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차를 내온 부인은 어렵게 한마디 했다. “지난번엔 정말 죄송했어요, 무례하게 행동해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부군께서는 가족을 무척 사랑하셨답니다. 막내 미영이가 태어난 후 보험금을 증액하면서 쓴 글인데요하며 청약서 한 켠에 가족에게 쓴 글을 부인에게 건넸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내 사랑하는 막내 딸 미영아! 아빠는 네가 너무 예쁘단다. 언제까지나 이 아빠가 너를 지켜줄게! , 이 글을 어려서 읽게 된다면 엄마말씀 잘 듣고 두 언니들과 잘 지내야 된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반대하는 보험을 오늘 두 번째로 증액했어요. 아무리 싫어해도 당신과 우리 딸들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니 이해해주리라 믿어! 당신이 많이 보고 싶을 거야...진영아, 선영아! 동생 잘 돌보고 예쁘고 씩씩하게 커다오. 아빠가 오래도록 너희들과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사랑한다 내 딸들아! 사랑해 여보!”

부인은 글을 다 읽어 내려간 후 흐느끼기 시작했다. 보험금 증서를 전달하며 나는 증서와 함께 이 글을 잘 보관하셨으면 합니다. 아빠가 세 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고 올바르게 자라는데 등대 같은 역할을 해 줄거라 생각합니다...” 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보험에는 다이아몬드의 광채도 없고, 자동차와 같은 편리함도 없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상품에는 인간의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애달픈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글에 등장하는 분들의 성명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