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서로 싸우는 존재?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들은 전쟁으로부터 '국가 간 침략은 미연에 방지되어야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전쟁 후 소련군은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철수하지 않았다. 미국의 외교정책 전문가 조지 케넌(George Kennan)은 위협을 느끼고 1946년 ‘소련은 서구민주주의 대신 국제공산주의 전파를 원한다’고 경고했다. 북미와 서유럽은 케넌의 주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전후 유럽의 경제재건을 위한 마샬플랜에 서명하는 트루먼 대통령. 뒤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이 조지 마샬 장관.
한편 소련은 4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주주의 운동을 중단시켰고 53년 동독의 민중봉기 진압, 56년 헝가리 혁명 무력 진압 등 동유럽에서 일어난 반(反)공산주의 운동을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이와 동시에 소련은 자국과 서유럽국가들 사이에 완충지대를 조성하기 위해 동유럽국들에 공산정권을 세웠다. 모스크바에 의해 조종되는 이 국가들은 소위 소련의 '위성국가들'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공산당들은 동유럽뿐 아니라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창당되었다. 48년 캐나다의 새 총리 루이 상 로랑(Louis St. Laurent)은 소련의 확장을 경계하던 서구 지도자들 중 하나였다.

종전(終戰) 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로 떠오른 나라는 미국이었다. 따라서 미국만이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소련이 공산정권들을 지원하고 세우는 동안 미국은 친(親)공산정권들을 전복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전후 세계는 두 초강대국들을 축으로 해서 분열ㆍ양극화된 것이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은 동부 유럽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이들 나라 국민과 외국인의 출입국을 통제했다. 소련 통제하의 동유럽 국가들과 서유럽 사이의 지정학적 경계는 철의 장막(the Iron Curtain)이라고 불리었다. ‘철의 장막’이라는 말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1946년 연설 중 "볼틱 해(바다)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바다의 트리에스테까지 중ㆍ동유럽에 철의 장막이 쳐져 있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전후 유럽의 경제재건을 위한 마샬플랜에 서명하는 트루먼 대통령. 뒤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이 조지 마샬 장관.
베를린과 유럽 무대
미/소 냉전서 첫 대결

동ㆍ서 양진영 사이에 발생한 긴장은 전후 독일에서 충돌했다. 전쟁 종반 독일은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소련등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역 안 150Km 거리에 있었지만 역시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됐다.

1948년 6월 소련은 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육로와 수로를 봉쇄해버렸다. 소련은 베를린을 봉쇄함으로서 보급이 차단된 서베를린이 결국 공산권에 넘어올 것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1949년 5월까지 10달이 넘는 기간 중 총 27만 7,728번에 걸쳐 234만 3,300톤의 물자를 200만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공수(空輸)함으로서 서베를린 사수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한때 미국 수송기들은 매 3분 간격으로 이륙했다.

미국의 강력한 의지에 당면한 소련의 조제프 스탈린은 1949년 5월 봉쇄를 풀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전 후 ‘냉전’이라고 불려지는 전쟁아닌 전쟁 중 벌어진 수많은 동ㆍ서 충돌 중 한 예에 불과했다. 베를린 봉쇄는 소련과 서방 세계 간에 적대심을 끌어올렸고 유럽장악을 원하는 소련의 의중을 드러냈다.

1961년 말 소련은 동독에서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베를린은 이때까지도 자유도시였기 때문에 동독의 숙련된 노동자들이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숙련인력의 빈번한 유출은 전후 피폐해진 동독경제 회복에 심각한 장애를 의미했다. 동독 경제의 붕궤가 우려되는 지경에 달하자 1961년 8월 소련은 동 서 지역 사이에 장벽을 세움으로서 이 위기에 대응했고 동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도주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1989-90년 무너지기까지 베를린 장벽은 동ㆍ서 양 진영의 분열을 웅변적으로 상징했다.

공산주의에 적극 대응
미국, 마샬 플랜 시행

초강대국이자 세계의 지도국으로서 미국은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에 맞서 싸웠다.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의 이름을 붙인 마샬 플랜(유럽부흥계획)이 대안으로 나왔다.

1947년 6월 마샬 미 국무장관은 유럽국가들에게 대규모 경제원조를 골자로 한 거대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미국은 동맹국들이 전쟁의 폐허로부터 재건되기를 바라는 동안 미국은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 대해서도 고려했다. 마샬 장관은 빈곤한 국가들이 공산주의로 전향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따라서 미국은 유럽이 빠른 시일 내에 탄탄한 경제를 확립 시키기를 원했다. 194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미 의회의 외국원조 종합계획을 신속히 승인하게 만들었다.

캐나다는 마샬 플랜에 참가하여 7억6천만 달러어치의 식량, 장비, 원료 등을 유럽에 보냈다. 1948년과 1953년 사이 캐나다ㆍ미국ㆍ기타 다른 국가들은 125억 달러를 서유럽에 지원했고 이로 인하여 유럽은 경제 회복세를 보였다.

마샬 플랜은 트루먼 독트린이라는 미국의 새로운 외교 전략의 한 부분이었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이름을 딴 이 전략은 유럽과 세계를 적화하려는 세계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중단 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 것이다. 드디어 소련과 세계공산주의를 목표로 한 미국의 적극적인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