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11년의 달력도 마지막 한 장을 남기고 있다. 눈이 이미 내린 곳도 있고, 제법 추워진 날씨였지만 남은 달력 한 장을 보면서 다시 겨울임을 깨닫는다. 겨울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한 편의 한국영화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본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겨울 나그네’다.
감성적 연출로 유명했던 곽지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안성기, 이미숙, 강석우, 이혜영이 주연했던 이 영화는 군부독재와 정치적 혼란기로 대변되는 19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 방황하던 젊은이들의 고뇌와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애절한 러브스토리다. 나는 아직도 최고의 한국영화라면 최인호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을 주저 없이 손꼽는다. 지난해 곽 감독의 자살소식으로 슬픔과 여운이 더해진 이 영화를 최근 다시 보면서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지금 보면 간간히 웃음 나오는 촌스러운 대사와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신파적인 요소들도 눈에 띄지만, 탄탄한 원작에 배우들의 뛰어난 감성 연기로 그 시대를 살았던 나에게는 그때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더불어 이 영화는 슈베르트라는 뛰어난 감성의 작곡가를 알게 해주었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슈베르트의 동명 가곡집 ‘겨울 나그네’는 영화를 더욱 쓸쓸하고 애절하게 만들었고, 슈베르트의 절망적 고독이 짙게 밴 멜로디가 주인공 민우와 다혜의 운명적 만남과 지고지순한 사랑, 그리고 이별 뒤의 고독과 방황으로 계속해서 오버랩되면서 나를 자극했다.
슈베르트는 한마디로 아름다운 멜로디로 유명한 고독의 작곡가다.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애에서 비극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슈베르트는 32년의 짧은 생애를 가난과 고독을 반복하며 병마와 함께 살아야 했던 비운의 작곡가였다. 슈베르트의 짧은 삶은 또한 너무나 드라마틱했었다.
모차르트의 삶을 영화화한 ‘아마데우스’나 베토벤의 사랑을 영화로 만든 ‘불멸의 연인’ 그리고 쇼팽의 삶을 조명한 영화 ‘블루노트’보다도 훨씬 이전에 이미 슈베르트의 삶을 각색한 뮤지컬 ‘꽃 피는 계절(Blossom Time)’ 있었는데, 1921년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하여 총 592회의 공연 기록과 1934년 영화화까지 되는 인기를 얻을 정도였다.
그의 삶은 한 편의 슬픈 영화와도 같았다. 슈베르트는 자랑할 외모도 아니었고 게다가 키가 작아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항상 말이 적고 깊이 고뇌하는 사람이었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그의 곁에는 많은 친구들과 조력자들이 있었지만, 지극히 내성적 성격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늘 고독했다. 타고난 허약체질에 겹쳐 끊이지 않았던 크고 작은 병들로 그는 죽음을 늘 지척에 두고 살았지만 이러한 절망적 고독, 고뇌와 번민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그 결과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교향곡, 실내악, 독주곡 등 전 분야에서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가곡의 왕으로 불릴 만큼 600곡이 넘는 가곡들을 남겼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창작에 몰입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의 작품마다 돋보이는 특별한 멜로디와 선율은 들을수록 심금을 울린다. 피아노 5중주곡 ‘송어’가 그랬고, ‘미완성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 ‘죽음과 소녀’ ‘아베 마리아’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등의 대표작들도 모두 아름다운 멜로디가 점철하는 걸작들이다.
서두에 그를 감성의 작곡가로 표현한 것은 그가 시를 사랑했고, 이를 음악으로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1년 전 마치 죽음을 예감한 듯, 현악 4중주곡곡 ‘죽음과 소녀’를 작곡했고. 이어어 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완성했다. 빌헬름 뮐러의 시에 음악을 붙인 겨울 나그네의 원제는 빈터라이제(Winterreise)로 영어로는 ‘Winter Journey’다. 즉 겨울 여행이나 겨울 나그네 길로 표기하는 것이 옳은데 일제시대에 일본어 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잘못 표기하여 겨울 나그네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송어를 숭어로 잘못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실연한 젊은이의 절망적인 어두움을 말한 뮐러의 시나, 어두운 잿빛으로 뒤덮인 애절한 그의 음악이나, 이 모든 것이 가슴 아픈 느낌의 여운으로 남아 겨울 나그네가 이 곡의 제목으로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겨울 나그네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한 탓에 나는 그를 겨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로 생각한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그의 가곡을 들으며 차창 밖 너머 하얀 겨울을 바라보는 잠깐의 여유는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 속에는 그의 고통을 생각하는 고독과 쓸쓸함이 함께한다. 가난과 병마로 늘 고독했던 슈베르트가 남긴 일기장의 한 구절이 항상 내 기억에 맴돌기 때문이다.
“남의 진짜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나는 고독하다. 그러나 이렇게 나의 고통에서 우러나온 작품은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다.”
송정호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