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월) 오후 주왕산국립공원에 들러 멋진 풍경 몇 컷을 카메라에 담은 후 대전초등학교에서 영어봉사하는 영혜양과 작변인사를 하고 청송읍을 거쳐 경북 문경군 점촌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 뒤였다.
어디에서 하룻밤을 지낼까 궁리하는 중에 우연히 노상에서 고향사람을 만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끝에 찜질방에서 함께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서울서 전날 내려왔다고 하는 그는 피곤한 몸을 풀기에는 찜질방이 최고라며 함께 가자고 권해 못 이긴 척하고 응했다. 19일 이른 아침 찜질방에서 나온 기자는 충주행 완행버스를 타고 문경새재 터널을 지나 충청북도 지역인 연풍에서 하차했다. 목적지 괴산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서다. 버스가 연풍 IC(국도 34번)에서 빠져나와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려주었다. 어린 시절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갈 때 찰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버스에 몰리곤 했던 바로 그 정류장이다. 차창 밖에서 “옥수수 사이소”라고 외치는 아낙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옥수수 출하가 시작되면 오늘날에도 옥수수 행상은 여전하다고 마을사람들이 들려주었다.
괴산을 방문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괴산은 ‘대학찰옥수수’라고 불리는 신품종 옥수수의 본고장이다. 대학찰옥수수는 충남대 농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을 한 괴산군 장연면 출신 최봉호 박사로부터 보급원년부터 매년 씨앗을 공급받아 파종하여 생산된 제품이다. 일반옥수수보다 통이 가늘고 당도가 높으며 껍질이 얇아 치아 사이에 끼지 않고 담백한 맛이 일품인 괴산 특산품으로 자리매김을 했다고 한다.
터미널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마을로 들어가 버스를 기다렸다.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힌 첩첩산골이다. 마을 백화점 격인 마트(Mart)에 들어가 주인에게 "높은 산이 많군요" 했더니 “저 산은 덕가산, 저 산은 보개산, 저 봉우리들은 미분봉, 마역봉, 악취봉, 신성암봉, 신선봉...”하며 주문 외우듯이 내뱉는다.
2시간 남짓 기다린 끝에 수안보에서 출발해서 괴산으로 들어가는 완행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는 할머니 할아버지 몇 사람을 달랑 태우고 물길을 따라 이어진 시골길을 따라 털털거리며 달린다. 수많은 산과 맑은 하천을 지나 목적지에 다다랐다. 험준한 소백산맥이 남동쪽을 가로막고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더니 정말 그랬다. 지명을 괴산(槐山)으로 붙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정류장에서 공중전화를 하니 서부리 소재 명덕초등학교에서 원어민 영어봉사를 하고 있는 토론토의 홍범석(22)군이 배웅 나왔다. 스키장에서 자주 뵙던 낯익은 얼굴이다. 명량한 성격에 팔방미인인 그는 스노보드 강사이자 기타리스트다. 한국말도 잘하는 호감 가는 젊은이다. 한석현 목사가 시무하는 본한인교회에 출석하면서 청소년집회와 찬양인도 등 봉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괴산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했더니 그도 그렇다고 응수했다.
험버칼리지(Humber College) 3학년으로 음악, 특히 재즈기타를 전공하는 음악도인 그는 원어민 영어봉사 장학생으로 지난 3월 이곳 초등학교에 부임해 신바람 나게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아이들과 너무 정이 들어 6개월 계약을 1년으로 연장했다고 말할 정도다. 대학 졸업 후 사범대학(Teachers' College)에 입학,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범석군은 영어봉사 프로그램인 토크(TaLK)야말로 동포 젊은이들이 한 번쯤 경험하면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금년 봄에 제98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 학교는 괴산군의 중심학교로 총 13학급에 학생 수는 326명. 시골학교치고는 많은 편이다. 한국에서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부모를 따라 이민간 범석군은 1년 만인 3월에 한국에 온 후 한국말이 되살아나 짧은 기간임에도 부쩍 늘어 기분이 좋다고 전한다. 세탁인협회장을 지낸 홍인기씨의 두 아들 중 차남.
범석군도 전국의 여타 토크 장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주 15시간 영어를 지도한다. 이 학교는 여느 시골학교와는 달리 영어실력이 뛰어난 영어전담교사 외에 필리핀여성 2명이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어 영어교육이 잘되고 있는 학교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9월에 부임, 6천만 원(캐나다화 약 6만 달러)을 들여 영어교실을 꾸몄다는 심혁국 교장은 범석군이 성격이 좋고 활동적이라 아이들이 친구같이 따르기 때문에 기분이 흐뭇하다고 평한다. 이 학교는 지난해 9월부터 올 3월까지는 하와이의 교민학생이 봉사하고 돌아갔다.
범석군이 진행하는 수업을 참관한 기자는 영어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도록 재치있고 재미있게 수업을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했다. 괴산군의 이웃인 증평군 증평읍의 증평초등학교에도 캐나다 출신인 찰스 리(Charles Chan Lee)가 토크 장학생으로 봉사하고 있으나 시간이 부족하여 그곳까지 갈 수는 없어 아쉬움을 남긴 채 위도 상으로 대한민국의 가장 한복판인 괴산을 떠나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토크(TaLk) 프로그램을 누가 알려 주었나.
-1기 학생 중에 친구들이 있다. 이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있던 차에 어머니도 한국일보에서 오려놓은 모집광고를 나에게 주며 응시하라고 해서 응모했다. 아버지도 적극 권장했다. 젊은 나이에 좋은 인생경험이라면서….
*수업을 어떤 식으로
-캐나다에서 배운 방식을 많이 적용한다. 대화 쪽에 치중했더니 아이들이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 교재는 영어전담 교사와 의논해서 구입하지만 대화를 많이 하고 발음에 중점을 둔다. 주로 방과후지만 정규시간에도 들어간다. 9시에 있는 것도 있다. 항상 학교에 있으니까 아이들이 항상 찾아와서 물어본다. 영어교실이 화려하고 놀 것도 많아 자주 찾아온다.
*아이들의 수업태도는 어떤가.
-영어시간을 아이들이 기다린다. 너무 순수하고 잘 따른다. 부모 없이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말하자면 결손가정 아이가 많다. 어느 날 어느 남자아이를 안아주니까 펑평 울어 가슴이 찡해왔다.
*숙소는 마음에 드는가.
-정부에서 월급 150만 원 외에 주거비로 매월 40만 원을 주어 하우스를 얻었는데 주인아줌마가 별채 방을 하나 만들어줘 불편함이 없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자취를 하는데 반찬은 넘치도록 많다. 주위사람들이 가져다 준 덕분이다. 시골이라 인심이 후한 편이다. 그러나 이곳 괴산은 불편할 것은 없는데 젊은이들이 할 것이 없다. 자연은 좋은데 너무나 자연적이다 보니 문화시설이 빈약해 이번 여름방학 기간 중 청주로 자취방을 옮길까 생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