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꾸옥은 땃타인의 가명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응웬땃타인은 본명보다 응웬아이꾸옥이라는 가명으로 유럽과 아시아에 더 잘 알려지게 된다. 호치민의 169개 필명·가명 가운데 가장 많이, 가장 오랫동안 사용됐던 바로 그 이름이다.

응웬아이꾸옥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주창한 윌슨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 베트남 독립을 호소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만날 수가 없었다. 편지를 썼다. 장문의 독립 청원서였다. 윌슨 대통령 비서로부터 짤막한 답장이 왔다.

"편지 감사합니다. 대통령께 전달하겠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베르사유 회담은 천사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이긴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들끼리 식민지 시장을 다시 나눠 갖는 그런 자리였다. 응웬아이꾸옥은 강대국에게 구걸해서 조국독립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이때 절실하게 깨달았다.

분노와 실망은 커갔다. 평생 '총을 든 마하트마 간디'라는 평을 받았던 호치민이 이때만큼은 젊은 혈기를 누를 수 없었다.



위험한 젊은이: 응웬아이꾸옥


베르사유 회담에서 얻어낼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응웬아이꾸옥은 '안남남 민족의 요구'라는 청원서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했다. 프랑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뿐 아니라 베트남을 통치하는 인도차이나 총독에게도 보냈다.

hohoho66.jpg여론 조성을 위해 신문사에도 보내고 프랑스에 사는 베트남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시민들에게도 인쇄물로 만들어 배포했다. 국제적인 호응은 없었지만 베트남 동포들 사이에선 열띤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베트남인들 가슴 속에서 패배감 대신 조국독립 열망이 피어올랐고 멀리 고국 땅 하노이 거리에서도 이 청원서가 사람들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니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당황했다. 도대체 응웬아이꾸옥, 이 자가 과연 누구일까? 대통령까지 나서서 응웬아이꾸옥이 어떤 사람인지 정체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프랑스 본국 경찰과 인도차이나 식민지 경찰이 비밀스럽게 조사에 나섰다. 베르사유 궁전에 나타난 베트남 젊은이, 유럽 현지 신문들과 유창한 언어로 인터뷰하며 베트남 민족의 요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이 젊은이가 도대체 누구인가? 프랑스 경찰본부에 보고된 자료엔 이렇게 적혀 있다.

"1890년 베트남 중부지방 낌리엔에서 출생. 아명은 응웬신꿍, 본명은 응웬땃타인으로 추정됨. 베트남 고위관료였던 응웬신삭의 둘째아들. 1908년 베트남 국립학교인 꾸옥혹에서 세금 반대 시위를 하다 퇴학, 프랑스 배 보조 요리사, 지금은 파리에서 사진관에서 흑백사진에 색깔을 입히고 고치는 일을 하고 있음."

이후 30년 동안 응웬아이꾸옥이란 이름은 베트남 국민들에겐 조국독립과 희망의 상징이었고 프랑스 식민지 당국과 경찰들에겐 두려움과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는 이렇게 1919년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 경찰과 베트남 동포 사이에서 주목 받는 핵심 인물로 불쑥 솟아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그건 아니었다.

이미 8년 전인 1911년, 고국의 항구도시 사이공을 떠나는 순간 이건 예정된 일이었다. 조국 독립투쟁은 그에게 운명과도 같은 세계였다. 청년 호치민이 이제 막 응웬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글 조영권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