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불교계의 큰스님으로 불리는 혜가 스님이 득도(得道)하기 전의 얘기다. 혜가는 도를 구하기 위해 달마대사를 찾아가 눈 속에서 3일 동안 꿇어앉아 있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자 혜가는 칼로 왼손을 잘라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때 달마대사가 방문을 열고 왜 이리 소란스럽냐고 물었다. 혜가는 “저의 마음이 아주 괴롭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도를 가르쳐달라고 간청했다. 달마대사는 “네 마음이 어디 있느냐. 마음을 내놓으면 고쳐주겠다”고 말했다. 뜻밖의 말에 혜가는 크게 당황하면서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혜가는 여기서 크게 깨쳤다. 득도하겠다고 고민한 자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데 따라 기쁨도 되고 슬픔도 되는 법이다. 혜가 스님은 마침내 득도의 경지에 이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한국 불교계의 ‘꺼지지 않는 빛’으로 불리는 이성철 스님의 법어다. 8년 동안 잠을 잘 때도 눕지 않고 수행한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유명한 스님이 내놓은 이 법어는 80~90년대 한국에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알듯 말듯 헷갈리는 이 말에 대해 온갖 억측이 나오자 어느 기자가 합천 해인사 백련암을 찾아가 성철 스님에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상을 바로 보는 눈을 말합니다. 팔만대장경에 그토록 많은 말씀이 담겨있지만 알고 보면 마음 심(心)자 하나에 모든 것이 귀결됩니다. 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그 실상을 바로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인 것입니다.”
불교가 어느 종교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부처가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견성(見性)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무심(無心)이라 하는데 무심 속에서만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마음의 눈을 뜨느냐 못 뜨느냐는 것은 불교인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에게도 주어진 숙제라고 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의 눈을 뜨게 되는가. 탐욕을 버려야 한다. 탐욕 때문에 인간의 시야가 흐려지고 세상에서 헤매게 된다. 깨닫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집착이다. 집착이 괴로움의 주범이다. 집착을 버리면 괴로움도 없어진다.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하는 집착이 문제다. 불교에서 무소유를 강조하는 이유다.
소유한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에 자가용을 소유한 것은 행복의 표준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거리마다 자가용 홍수를 이루는 요즘에 자가용소유의 행복감이란 크지 않다. 남에게 없을수록 빛을 발하는 게 소유다. 즉 불평등과 차별 위에서 나의 행복이 존재한다.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린 숭산 스님이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선원을 하고 있을 때의 얘기다. 선원은 예일대 주변에 있어 숭산 스님의 제자 중 예일대 학생이나 교수들도 많았다.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던 어느 학생이 질문을 했다. “어떤 것이 미친 것이고, 어떤 것이 미치지 않은 겁니까?” 스님이 답을 했다. “미쳤다는 것은 어떤 것에 매우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집착하면 조금 미친 것이고, 많이 집착하면 많이 미친 것이다. 만약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는 미치지 않은 사람이다.”
숭산 스님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 미쳤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나’라는 것은 생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네 마음이 어디 있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모두가 미쳤다”는는 말은 표현은 다르지만 메시지는 모두 같다. 마음의 눈을 뜨라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욕심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조금만이라도 줄인다면 삶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설계하는 요즘 세 스님이 남긴 법어는 곰곰이 새겨볼 만한 금언이라고 본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