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모래알이다.
미국 옐로스톤국립공원이나 탄자니아 세렝게티평원의 야생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 말이 실감난다. 옐로스톤에선 늑대 한 마리만 나타나도 덩치가 다섯 배쯤 커 보이는 엘크들이 혼비백산, 떼 지어 달아난다. 늑대가 무리 한가운데로 파고들면 엘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뭉치면 그까짓 늑대 백 마리라도 능히 대적할 수 있을 텐데… 아니, 거대한 뿔을 보면 일대일로 맞붙어도 그다지 꿀릴 게 없을 것 같은데 결국 엘크는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모래알의 슬픔이다. 그 무시무시한 뿔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네 수컷들끼리 싸울 때만 치명적인 흉기가 된다. 자연의 섭리이겠지만 참 못났다.
대중이란 말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못난 대중에 의해 이뤄지는 민주주의를 중우정치(衆愚政治)라 한다. 이 말의 연원은 고대 그리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폴리스(polis) 정치를 주의 깊게 살펴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목소리만 크고 어리석은 다수의 대중이 지배하게 된다고 갈파했다.
중세·근대에 이르러서도 대중정치를 혐오하는 보수적 정치인이나 사상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과 멸시의 수단으로 곧잘 중우정치를 들먹였다. 21세기에도 독재자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단어다.
대중이 꼭 그런가. ‘대중의 지혜(wisdom of the crowd)’란 말이 있다. 제임스 서로위키(James Surowiecki)는 같은 이름의 저서에서 실험결과를 토대로 “특정 조건이 주어지면 집단은 그 내부의 가장 우수한 개인보다 더 지능적”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이 협력해 지혜를 모으면 특출한 인재 한 명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
어려운 예를 들 것도 없다. 우리 속담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란 말이 있다. 고리타분한 공자말씀이 아니다. 프랜시스 골튼(Sir Francis Galton, 1822~1911)이라는 영국의 인류학자는 이를 실증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1906년 골튼은 고향인 영국 플리머스에서 열린 박람회를 찾았다. 한 켠에서 상금을 걸고 소 몸무게 알아맞히는 게임이 진행 중이었다. 군중들 속엔 푸줏간 주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반인들이었다. 흥미를 느낀 골튼은 800명의 예상답변을 모아 평균을 냈다. 543.4kg이었다. 소의 실제 무게는 543.9kg. 오차는 0.1%에 불과했다.
사실 골튼의 목적은 딴 데 있었다. 세상은 극소수의 전문가가 이끌어가고 대중은 사회발전에 기여할 만한 지적(知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상상 이상으로 대중은 영리했고 집단의 힘은 강했다.
사례는 또 있다. 토론토에 본사를 둔 골드코프(Goldcorp)는 세계적인 금광회사다. 1990년대 말 이 회사는 위기에 봉착했다. 50년 이상 금을 캐온 온타리오의 레드레이크 광산이 바닥나 새 금광을 찾아야 했다. 회사 내 전문가들만 믿고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고경영자(CEO)인 맥이웬은 대중공모 방법을 택했다. 상금 57만5천 달러를 내걸고 새 금맥 정보를 공개모집했다. 70만 에이커에 달하는 자사소유 광산에 대한 모든 정보도 함께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네티즌들 관심이 폭발했다. 지원자들이 콕 짚어 표시한 곳은 무려 110군데였고, 그 중의 절반은 회사 소속 지질학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장소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대중이 찍은 후보지의 80퍼센트 이상에서 금광석이 쏟아져 나왔다. 이 회사 주식값은 10년 동안 30배나 올랐다.
이래도 대중이 어리석은가. ‘대중의 지혜’에도 함정은 있다. 단순실험이냐, 상금이 걸린 실험이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재미삼아 하는 실험에선 객관성보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앞선다. 따라서 신뢰성에 결정적인 흠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상금이 걸리면 달라진다. 가능한 한한 개인편견을 버리고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려 한다. 쉽게 말해 내 이익이 걸리면 사람들은 덜 우매해지려고 노력한다.
이 말도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사실이 알려진 지난 19일 한국 주식시장은 붕괴직전까지 치달았다. 투매(投賣)현상이 벌어져 주식값이 5% 정도 폭락했다. 자기 돈이 걸려 있어도 투자자들은 이성을 잃었다. 대중은 현명하지만 이처럼 극단적인 집단쏠림에 휘말릴 위험이 상존한다.
2011년이 저문다. 덕담만으로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기엔 토론토 한인사회에 탈도 많았고 아픔도 컸다. 대중이 모래알처럼 흩어진 틈을 타 극소수 돌출분자들이 한인사회 물을 흐려 놓았다. 새해엔 ‘대중의 지혜’를 제대로 되살려보자.
조영권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