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개월간 토론토한인사회에 온갖 ‘검은 연기’를 뿜어대던 한인회사태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상훈 회장과 이방주씨는 지난 16일 31대 회장선거와 관련한 5개 쟁점에 대해 타협함으로써 가까스로 파국은 면하게 됐다. 양측 합의사항을 보면 ◆이방주씨 소송 취하 ◆지금까지의 변호사비 각자 부담 ◆이씨 등록금 1만5천 달러 반환 ◆현 세칙대로 선거를 다시 실시하되 ‘3년 이상 정회원’ 입후보 자격부여 건은 총회 결정에 따른다 ◆이번 선거에 이씨 출마 허용 및 1만5천 달러 등록금 조항은 그대로 둔다는 것 등이다. 양측 합의에 대해 이사회 측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지수지만 이사회는 지체 없이 수용함으로써 이제라도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번 사태가 장기파행한 데는 이사회의 책임이 어느 누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얼마나 명분 없는 소모전인가는 5개 합의사항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씨의 소취하 등 모든 내용이 이미 사태 초반에 본보와 한인사회 중재안 등을 통해 언급됐던 것이다. 당시는 양측 모두 오기와 자존심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선거를 치르라”는 여론에 귀를 막고 전의를 불태웠지만 변호사비를 엄청 날리고서야 정신이 든 모양이다. 돈도 돈이지만 이번 내분으로 한인회 이미지는 엉망이 됐다.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문제만 자가생산하는 단체라는 무용론의 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때문에 한인회는 이번 사태를 재탄생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런 비장한 각오 없이 이미 돌아선 한인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 선거 때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일개 동창회 수준의 선거세칙부터 대표단체로 탈바꿈하기 위한 제도 정비에 이르기까지 시스템을 대폭 개혁해야 한다. 가장 급한 것은 이번 선거를 공명정대하게 치르기 위해 선관위 조직부터 수술해야 한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선관위의 공정·중립성이었다. ‘사전계획설’에서 보듯 이씨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선관위가 너무한 게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선관위는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런 점에서 선관위원장은 사과하고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한인회의 변호사비 지출문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자선단체의 공금은 정당한 용도로만 쓰여야 하며 불필요한 낭비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인회측은 변호사비 지출내역을 분명하게 공개하고, 앞으로는 일부 이사 및 임원들의 감정적 문제로 한인회가 법정문제에 휘말리지 않게 교훈삼아야 한다. 아울러 이 회장은 하루빨리 임시총회를 소집, ‘3년 이상 정회원’ 자격조항을 개정하길 바란다. 두 달 전 본란을 통해 지적했듯이 한인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문호를 전면개방해야 한다. 금년 초 이방주씨와 재출마하려다 포기한 이 회장이 러닝메이트 구인난을 겪은 데서 보듯 ‘3년 이상’ 조항은 유능한 인재의 영입을 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일부에서는 “경기 중에 규칙을 바꿀 수 없다”며 반대하지만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차원에서 이 규정은 철폐돼야 한다.
한인회장 선거를 치르는 것도 커뮤니티 훈련이다. 이번 분규로 한인사회의 고질병과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는 등 아주 비싼 훈련비를 냈지만 한인회 재탄생의 전기로 삼는다면 깊은 상처는 자연히 아물 것으로 본다.
검돌 이석현 선생이 남긴 선물
캐나다한인사회의 큰 어른인 검돌 이석현 선생이13일 83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했다. 이 선생은 한인언론계와 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독실한 가톨릭 교인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많은 한인들이 그의 타계에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선생은 77년 본 한국일보에 입사, 99년 퇴사할 때까지 22년간 편집국장과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본보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본사에 입사했던 70년대 한인언론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토론토 한인인구가 수천 명에 불과, 신문사의 주요 수입원인 광고시장은 영세했고 독자 수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게다가 툭하면 터지는 우편파업으로 본사가 재정적 위기에 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생은 이런 힘든 시절에 들어와 본보 전신인 주간지 ‘캐너더뉴스’ 제작에 매진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 덕에 본보는 숱한 격랑을 헤치고 81년 일간지로 전환, 한인 대표신문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그의 기자인생은 한국일보의 귀중한 역사이자 캐나다한인언론의 역사다.
고인은 이 땅에 이민문학의 씨를 뿌린 ‘문인들의 대부’이기도 하다. 60년대 한국 자유동시운동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그는 본사 입사 직전인 77년 1월 캐나다문인협회 창설을 주도, 오늘의 문협이 있게 한 장본인이다. 이민문학 불모지인 이 땅에 신춘문예를 시작했고 본사 재직 중에 왕성한 문학작품 활동을 병행, 시집과 동화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선생은 또 한인가톨릭계의 어른으로 사랑을 실천했고 늘 겸손했다. 누구와도 격의 없이 지냈고 사람들의 흉허물을 감싸줘 많은 사람이 따랐다. 선생은 떠날 때도 그답게 떠났다. 가족들과 담소하다가 눈을 감으면서 편안히 삶을 마감한 것이다. 평생을 문인으로 언론인으로 살다간 선생의 온유하고 우직했던 삶은 이곳 한인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