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밴쿠버에서 돌아가신 고 이축길 선생은 한국일보 서울본사 사진부장을 지냈고 캐나다한국일보사 고문을 역임하셨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가 그를 애도하는 것은 아니다. 애도의 주된 이유는 그분의 인생에 대한 태도와 세상을 보는 시각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인은 임종을 앞두고 동서이자 친동생 같던 강태경(오크빌 거주)씨에게 "지저분하게 죽지말고 박정희같이 깨끗이 죽어야하는데 병원에 들어와 있으니 이게 뭐냐"고 푸념했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문상객들에게 절대로 쩨쩨하게 대접하지 말라"고 큰소리로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단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남은 인생에 대한 구차스런 애착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읽혀질 당신의 이력은 또박또박 자필로 정리했으나 유서나 유언을 남기는 일은 "쑥스럽고 부질없다"면서 생략하셨다.

2개월 전부터 가슴의 통증과 함께 호흡이 힘들어 병원을 한두 차례 찾았던 고인은 평소의 희망대로 갑작스런 죽음은 맞지 못 했지만 굵고 짧은 투병 끝에 누구도 전혀 예상치 않았던 순간에 이승의 보따리를 싸 휘휘 떠나셨다.

12년 전 밴쿠버로 이주하기 전, 토론토에 오래 사셨기에 선생의 영혼을 위로하는 연미사(죽은 이를 위한 미사)가 지난 25일 토론토 성 김안드레아천주교회에서 최규식 신부의 집전으로 있었다. 이 비공개 미사에는 가까운 친지와 고인의 대자·대녀들이 조촐하게 모여 그의 명복을 빌며 추모했다.

86세라는 나이가 무색한 건강과 체격을 유지했고, 행복한 가족과 믿고 의지하는 친지들을 가졌으며, 신앙심도 남달리 깊었던 선생. 그의 별세는 아쉬움 속에서도 '호상(好喪)'으로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행여 치매나 불치병으로 고생하면서 생명을 '연장'하는 데 그치는 삶을 이어갔다면 우리의 뇌리에 각인됐던 '대나무 이축길'의 영상이 흐려질 수도 있었기에 말이다.

불의와 부정직, 잘못을 보면 직언을 서슴지 않으시면서 평생을 고고하게 지낸, 그래서 늘 '대쪽'이란 수식어가 붙던 선생은, 때로는 호탕했고, 때로는 칼날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기개 높은 사나이였다. 대부(代父)는 인격적으로 누구에게나 존경받은 분이었노라고 나는 큰소리로 증언할 수 있다.

유감이라면 그가 몽매에도 그리던 고향 평양을 생전에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통일이 돼 북녘 땅 어디라도 자유롭게 나다닐 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과연 그날이 선생과 같은 '1·4후퇴 피난세대'의 생전에 올 수 있을 것인가. 그의 타계가 더욱 아릿하게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다.

고인이 1994년에 쓰신 '망향가'를 읽을 때 눈물이 핑 도는 것은 그의 간절한 소망이 구구절절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본 대학서 사진학을 공부하고 평생을 사진작가로 사셨던 선생의 시는 북녘에 두고 온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사진처럼 들려준다. 평양을 방문했던 친구가 모란봉·대동강 등을 찾았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이를 화폭에 옮겼고 어떤 연유로 이를 선생께 선물했다고 한다. 선생은 이 유화를 방에 붙여놓고 매일 바라보면서 실향(失鄕)의 아픔과 함께 사셨다.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며 시를 소개한다.

망향가

-이축길

영명사(永明寺) 뜰 안에는
을밀대 그림자 내려앉고

주암산 가는 길엔
노을이 타는구나

사십여 년 긴-긴 세월
병인 양 망향의 나날들


대동강 유-유히 흐르고
공산엔 모란봉 그대론데

그리운 얼굴들 간데 없고
허허한 공간만이 서글프구나


*영명사: 평양 중심지인 모란봉구역의 모란봉 언덕에 있다. 영명사는 대동강과 능라도, 평양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예전부터 명승지로 유명했다.

*모란봉: '조선 8경' 중중중 하나로 꼽히는 곳.

*을밀대: 평양직할시 중구역 금수산(錦繡山)에 있는 고구려 때 세운 누정(樓亭).

*주암산: 평양에 있는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