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토록 소중히 간직하던 사진 등 자료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신혼인 아버지가 일본유학중 사망함으로써 유복녀로 태어난지라 홀어머니가 유일한 혈육이었으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1990년도에 세상을 떠난 뒤 그야말로 의지할 데 없는 혈혈단신인지라 물어볼 사람이 없다. 먼 친척인 최원복씨마저도 알지를 못 하고 있다.
그는 누구를 말하는가? 다름 아닌 지난 1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인사회 최초의 소셜워커(social worker) 캐슬린 리(이종민)씨다. 70년대 초기한인사회의 발전한 크게 기여한 지라 희귀한 많은 자료들을 갖고 있었다. 본인 자신에 관련된 것들도 물론 많았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인 2002년 3월이다. 171cm의 헌칠한 키에 건강한 체구를 가졌던 그가 건강을 잃고 마침내 조기은퇴한 후 외롭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처를 찾아간 것이다.
가보니 들은 바대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측은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토론토 동부 댄포스 선상에 있는 초라한 2층 아파트의 아래층에 세 들어 있었다. 당뇨와 고혈압?시력약화로 보호자의 부축을 받지 않고서는 바깥출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찾아간 필자의 얼굴도 어렴풋한 형상밖에 보이지 않고, 글자만은 큼직한 특수 확대경을 이용해 가까스로 판독할 수 있다고 했다.
50년대에 미국유학을 마치고 60년대에 귀국, 대학교수 등을 지내며 한국 사회복지사업의 기초를 다진 뒤 71년도에 캐나다에 이민 와 토론토에 정착한 그와 한나절을 보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해서 작성한 것이 한국일보 2002년 3월25일자 특집이었다.
그는 소장하고 있던 많은 사진자료를 보여 주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기억력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학교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알게 된 사람들의 이름을 필자와 인터뷰하면서 술술 기억해냈다. 4대째 독실한 천주교신자라는 그는 정신만은 온전하게 남겨두신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사진 몇 장을 빌렸다. 필요한 사진을 신문사로 가져가서 복사한 후 돌려주겠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난색을 표명했다. 한참 설득해 빌리는 데 성공했다. 잊지 않고 꼭 돌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며칠 후 약속 대로 돌려주었다. 그런 뒤 전화가 왔다. 돌려받은 사진을 헤아려 보니 한 장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확인해 보니 한 장이 취재수첩 속에 끼어있었다. 다시 찾아가 나머지 한 장을 전달해주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 고인에 대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최씨로부터 전해 들었다. 최씨는 한국일보에 고인과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것으로 기억된다면서 토론토시정부의 사회봉사(social service) 기관으로부터 장례비 지원금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며 복사본을 얻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이 기사 등 덕분으로 무연고자 장례비 지원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고인이 신주같이 여기던 자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3개월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장기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는 과정에서 소실됐는지 아니면 그 이전에 본인 자신이 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고인에게는 지난 6년 이상 동안 틈틈이 찾아와 돌봐주던 한인여성이 있었고, 연금 등을 관리해주던 관재인(public trustee)이 있었다는데 이 분들이 혹시 이에 대해 알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한인사회 이민역사 편찬에 필요한 귀중한 자료들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 이러한 자료들을 혼자 갖고 있다가 없애버리기보다 공신력 있는 한인사회 기관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일보사 이민사자료실이 바로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