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은 변호사가 된 지 얼마 안 돼 매우 중요한 사건을 맡게 됐다. 그와 함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들은 관록 있는 거물급이었다. 그중의 한 명은 링컨을 보자마자 “저런 애송이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나는 저런 촌뜨기와는 같이 일할 수 없으니 빨리 꺼지라고 해”라고 폭언을 했다.

링컨은 모욕적인 말을 들었지만 애써 못 들은 척 했다. 재판 중에도 링컨은 다른 변호사들로부터 완전히 따돌림 당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일같이 법정에 나와 자기를 모욕한 변호사의 능숙한 변호솜씨를 지켜봤다. 재판은 링컨 쪽 승리로 끝났다. 링컨은 그 다음날 사표 내면서 동료직원에게 말했다. “그 분의 눈부신 변론은 내게는 엄청난 계시였다. 나는 도저히 그의 맞수가 되지 못 한다. 시골에 돌아가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

20여 년 후 링컨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그토록 심하게 면박했던 변호사는 계속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래도 링컨은 전쟁장관 자리가 비었을 때 주저 없이 그를 임명했다. 그만큼 유능한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장관이 된 다음에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링컨이 암살되었을 때 둘도 없는 위인을 잃었다며 누구보다도 서러워한 것은 바로 그였다. 그는 에드윈 스탠턴. 독설과 변덕스런 기질로 거의 모든 북군사령관들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 사람이다.

3년 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는 수천 명이 참가한 대규모 반미시위가 열렸다.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미시위대는 말레콘 해변도로를 따라 반미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미국대표부 건물 앞에서 멈췄다. 대표부 건물 맞은편에는 대형 전광판이 새로 설치됐다. 카스트로가 군중 앞에서 연설을 시작할 때 전광판에는 “누구도 동의 없이 어떤 사람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글귀가 나타났다. 링컨의 유명한 연설 문구였다. 카스트로가 열렬한 링컨 숭배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반미시위 현장에서 미국대통령을 지낸 링컨의 연설을 인용한 것은 상상 밖이었다. 링컨과 동시대를 산 톨스토이는 “역사상 영웅과 위인이 많이 있었지만 진정한 거인은 링컨 한 사람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형제처럼 대했기 때문이다”고 추켜세웠다. 처칠은 연설 때 무대 뒤에 대형 링컨사진을 걸어놓아 무한한 존경심을 표시했다.

오늘(12일)은 링컨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위인전에나 나오는 인물이 지금도 살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인가. 통나무집의 가난을 딛고 정직과 성실로 대통령까지 올라 예수의 수난일에 희생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보존해 가는 통합정신, 남북전쟁에서 발휘한 지도력, 적과의 화합과 관용을 강조한 종전정신이 오늘의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힘든 선거전을 치르던 링컨은 한 소녀의 의견을 받아들여 턱수염을 길렀다. 턱수염은 그의 이미지를 바꿔 대통령이 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소녀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경청한 덕에 링컨은 궁극적으로 노예해방을 선언할 수 있었다. 하찮은 소녀의 아이디어인 턱수염이 통합의 표상이 됐고 역사까지 바꾼 것이다. 링컨은 미국이 두 동강나는 것을 막기 위해 평화를 선택한 게 아니라 전쟁을 택했다.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힐 수가 있는데도 전쟁만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란 신념 하나로 정면돌파했다. 지도자가 앞을 내다보는 눈을 가졌을 때만 가능한 결단력이다. 남북전쟁은 잔인했다. 4년간 62만 명이 죽었다. 링컨은 패자 쪽에 담겨진 반역의 실체를 추적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화합과 관용으로 전쟁의 참상을 치유했다. 남군 로버트 리 장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버지니아주 애포머톡스의 기념문에는 링컨의 종전정신이 쓰여 있다. “이곳은 우리가 이긴 곳이 아니니다. 남북이 다시 합쳐진 곳이다.”

링컨이 없었다면 미국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세계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할수록 링컨은 위대한 대통령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