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비에 가로 왈자’라는 속담이 있다. 사슴가죽, 녹비(鹿皮)를 위아래로 당기면 날 일(日)자로 보이고, 좌우로 당기면 다시 가로 왈(曰)자로 보인다는 뜻이다. 요즘 세계경제 예측이 그렇다. 안정을 되찾아 가던 세계금융시장에 2차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깔리자 일(日)자와 왈(曰)자에다 ‘하얗게 질린’ 백(白)자 예측까지 나온다.
전문가들의 예측이 별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지만 그래도 예측이 필요한 것은 판단에 참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과 전문기관의 견해를 크게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2010년 회복설이다. 2년 전 미국발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견했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루비니교수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금년 말까지 회복이 어렵고 아무리 빨라도 2010년은 돼야한다”고 내다봤다. 그는 경기전망에 대해 “미국과 전세계의 자산가치가 현재보다도 15~20% 더 줄어들 것”이라며 주택시장과 증시가 바닥을 치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고 진단했다. 경제위기의 진원지인 미국 집값에 여전히 거품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집값 하락이 멈춰야 압류가 줄어들고 부실채권이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둘째는 중병설이다. 루비니와 함께 이번 금융위기를 예견한 중국의 경제전문가 쑹훙빙은 “미국경제가 5년 안에 회복하기는 어렵고, 앞으로 10~15년 정도 침체상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작년 6월 미국의‘서브프라임’위기가 세계금융위기로 발전할 것이라고 재차 경고한 바 있는 쑹훙빙은 엊그제 “2차 세계금융위기가 이미 시작됐다”고 단언했다. 그는 “세계 각국이 내놓은 시장구제정책이 금융위기 확산을 막지 못했으며 갈수록 위기의 속도가 빨라지고 맹렬해진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2차 금융위기의 증상으로 미국의 각종 경제지표가 아주 나쁘게 나오고 있고, 미국은행들의 문제점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점 등을 꼽았다. 작년 말 메릴린치를 인수하면서 금융위기의 '승자'로 평가받았던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시티그룹이 최근 엄청난 적자를 기록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두 은행이 살길은 국유화뿐이라고 밝혔다. 만약 두 은행이 국유화한다면 실제 경영이 정상화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바 금융위기가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셋째 공황설이다.‘헤지펀드의 제왕’으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은 지난 20일 “지금의 금융위기가 대공황 때보다 실질적으로 더 심각하다는 판단”이라면서 “자유시장 모델이 실패한 것으로 본다”고 선언했다. 소로스는 “지금까지 경험한 그 어떤 위기와도 성격이 다르다”면서 “금융위기가 바닥에 도달했다는 어떤 조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 금융정책의 대부 격인 폴 볼커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장도“경제전문가로서 상황이 이토록 심각해질 것이라곤 짐작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으면서 “1년 전만해도 미국은 힘들어도 세계의 나머지 지역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볼커는 “심지어 대공황 때도 지금처럼 급속히 악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경제 흐름을 보면 두 사람의 말이 그렇게 과장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간 국제사회서 일본만은 최악의 상황을 피할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현금이 넘쳐나는 일본은행들은 월가의 자본 확충을 돕고, 일본기업들은 본격적으로 미국기업 합병에 뛰어들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런 일본이 지금 타이태닉호처럼 가라앉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들의 줄파산에 이은 또 하나의 ‘블랙스완(black swan)’이 아닌가 싶다.
전문가들의 예측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경제위기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봐도 앞으로 2년은 더 가야한다. 그것도 2년 후엔 2007년 이전 상태로 복구된다는 뜻이 아니다.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녹비가 갑자기 호피로 둔갑하거나 왈자가 어쩌다 바를 정(正)자로 바뀌는 요술은 없다는 소리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