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파이팅’이 어우러지면 기적을 만든다.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랬고 작년 베이징올림픽 때도 그랬다.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도 예외가 아니다. 대회 전 외신들의 출전팀 전력분석을 보면 한국은 4강 정도면 체면치레는 할 것으로 생각됐고 국민들도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예상 밖의 ‘대형사건’이 또 터졌다. 한국이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강호들을 연파하고 결승전에서 일본과 드라마 같은 명승부를 펼치자 외신들의 찬사가 쏟아진다. LA타임스는 “호투와 적시타, 몸을 던지는 명수비는 진정 최고수준의 결승전”이라고 극찬했고 AP통신도 “아시아판 양키스-레드삭스 경기였다”고 치켜세웠다. 어느 미국기자는 "30년 넘게 야구를 봤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은 처음이다"고 흥분했다. 남들이 너무 칭찬하니까 오히려 우리 자신이 좀 쑥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대~한민국’과 ‘파이팅’은 어떤 마력을 지녔기에 계속 신화를 만들어내는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대~한민국’엔 가슴이 뭉클해지겠지만 ‘파이팅’은 ‘뭉클’과는 좀 거리가 있다. 특히 외국인 앞에서 ‘파이팅’을 외치면 싸우자는 말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전투적인 느낌을 주는 ‘콩글리시’다. 굳이 어원을 따지자면 ‘fighting spirit(투지)’로 일본에서 흘러온 말이다. 하지만 이런 어법에도 맞지 않은 말이 특히 운동구호로 쓰이면 괴력을 발휘한다. 한국인의 기(氣)를 한 데 모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바람 민족으로 불리는 한국인의 기가 합쳐지면 외국인들이 보기에 기찬 일들이 벌어진다.
이런 일화가 있다. 88년 서울올림픽 때의 일이다.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국운을 걸고 개최한 스포츠행사였다. 세계에서 선수들과 관광객이 몰려들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소매치기들이 날뛰어 관광객과 선수들이 돈이나 귀중품을 몽땅 잃어버린다면 올림픽에 악영향을 줄 뿐 아니라 한국이미지에 먹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직위의 이런 우려가 언론에 보도되자 기상천외의 일이 일어났다.
‘수도권 소매치기 회의’가 열린 것이다. 서울과 인천의 소매치기조직 보스들이 비밀리에 모여 올림픽기간에는 휴업하자고 결의했다. 수도권 소매치기들의 휴업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올림픽동안 외국인에 대한 소매치기 사건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소매치기들이 ‘코리아 파이팅’에 동참한 셈이다. 올림픽이 멕시코나 베네수엘라에서 열린다면 소매치기들이 휴업선언을 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한국에서만 가능한 사건이다.
2002년 월드컵 때는 기찬 실력도 실력이지만 응원은 세계적으로 화제였다. 한국민의 질서의식을 보며 외국인들보다 더 놀란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WBC 1회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김인식 감독은 4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아직도 몸이 편치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국가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는 말로 ‘대한민국 파이팅’을 진두지휘했다. 메이저리그 감독들에겐 ‘기가 막히는’ 일로 비쳐질 수가 있다. 한국선수들도 마찬가지다. 거액의 몸값을 받는 메이저리거들이 “다치면 나만 손해”라며 대회 출전에 몸을 사릴 때 한국선수들은 달랐다.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건 더 없는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런 파이팅정신이 담대한 희망을 쏘아 올린 것이다.
한국인의 ‘파이팅’이 신화를 창조하는 것만은 아니다. 노사분규 등 사회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도 한다. 타임지의 표현을 빌리면 '죽도록 파업하기(striking to death)'가 한국노사문화의 자화상이다. 왜 한국인은 운동을 해도 ‘죽도록’ 하고 파업을 해도 ‘죽도록’ 하는가. 극단적 성향의 기질 때문이며 그 바탕에는 신바람문화가 있다. ‘일할 맛’ ‘운동할 맛’이 나야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지만 그런 맛을 잃는다면 ‘못 먹어도 고(Go)’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한국인이 한 번 신들리면 자기도 놀라는 잠재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베네수엘라를 이긴 것도, 일본과 연장 접전의 명승부를 벌인 것도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능력발휘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자신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포함하고 있다. 이번 WBC에서 한국인이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