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넬 웨스트라는 유명한 흑인교수가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교수로 TV쇼의 고정 게스트로 활약했으며, 그의 인종사상을 주제로 한 영화(매트릭스2)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가 8년 전 뉴욕에서 당한 인종차별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아내와 저녁 약속한 식당으로 가기 위해 맨하탄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었다. 내 손짓을 무시하고 서너 대가 그냥 지나갈 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9대의 택시가 지나쳤을 때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0대째 택시가 다가왔다. 내 앞에 서는 듯하더니 옆에 있는 백인여성 앞에서 멈췄다. 택시운전사는 그녀를 태운 후 번개처럼 사라졌다. 나는 분노하기에 앞서 충격에 빠져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내가 택시 하나 잡을 수 없다니.... 세계 최고의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는 지하철을 타고가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늦었다. 지각 이유를 아내에게 설명했다. 즐거워야 할 우리의 저녁식사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웃으려고 노력했는데 도무지 웃어지질 않았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교수가 택시 하나 못 잡아탔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에게 ‘죄’가 있다면 피부가 검은 것밖에는 없다. 법으론 인종차별이 없는데도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종에 관한 한 두 얼굴을 가진 곳이 북미다.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고 주장하지만 자녀가 흑인과 결혼하는 것은 반대한다. 만인은 평등하다고 부르짖지만 바로 옆집에 흑인이 이사 오는 것은 싫어한다. 법으로는 평등이 보장돼 있다. 하지만 사회가 평등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평등이 실현되는 법이다. 법 규정만으론 불가능하다.
‘화이트 독(White Dog)’이란 영화가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얀 셰퍼드는 백인에게는 순종하지만 흑인만 보면 쫓아가 죽을 때까지 물어뜯는다. 개주인은 셰퍼드가 왜 흑인만 보면 살인견으로 돌변하는가를 조사한 바, 전 주인이 인종차별주의자임을 밝혀낸다. 강아지 때부터 흑인을 물도록 훈련시킨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개의 전 주인이 온화한 백인할아버지라는 점이다. 그는 손녀에게는 지극히 인자하지만 흑인은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다.

겉으론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피부색깔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사실은 각종 심리연구로 확인된바 있다. 작년 스탠퍼드대의 심리학자인 제니퍼 에버하트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북미에는 아직도 인종편견이 널리 잠복해 있다. 실험에는 대학생 100여 명이 동원됐다. 대학생들에게 백인과 흑인의 사진을 짧게 내비친 뒤에 원숭이의 흐릿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흑인얼굴을 본 학생들은 원숭이임을 금방 알아챘다. 이는 흑인사진이 잠재의식에서 흑인과 원숭이 사이에 연상을 불러일으키도록 자극한 결과다. 에버하트의 연구결과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북미의 다양한 인종들이 무의식적으로 흑인을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흑인을 보면 원숭이를 떠올릴 정도로 경멸한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 선택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웨스트 케이스나 에버하트 연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게 많다. 과연 한인들은 흑인을 어떻게 보는가. 그들 앞에서 인종차별문제를 꺼낼 수 있는가. 우리가 이곳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며 울분을 터트릴 때 한국에 왔던 흑인미군들이 한국인들로부터 당했던 차별대우도 한번쯤 떠올릴 필요가 있다. 흑인에게 ‘깜둥이’라고 부르는 것은 누가 우리에게 ‘조센징’이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동양인들이 북미에서 쉽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흑인들이 가시밭길을 헤쳐 놓았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2번이나 감옥에 갔다 온 덕에 우리들은 인종차별을 적게 받고 있는 것이다. 인종차별은 무지에서 나오는 편견이다. 한인들이 많이 걱정했던 온주 케스윅고교사건도 실은 동양계학생에 대한 백인학생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종차별에는 단호하게 대처하되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인종편견도 함께 허물어야 한다. (언론인)